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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플레이스 8 - [바빌론의 탑]과 카비르 사막

표면 형성 물질에 따라 여러 종류의 사막이 있다는 걸 스물이 넘어서야 알았다면, 사막이 남극과 북극에도 있다는 걸 서른이 넘어서야 알았다면 너무 무식한 걸까? 이란의 카비르 사막 언저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모래사막은 아니었지만 분명 식물이라곤 자랄 수 없는 자갈과 돌로 뒤덮인 땅이었다. 처음에는 드디어 사막을 보게 되었다고 좋아라 했다. 그러나 첫 경험의 환희는 다음날도 같은 풍경을 지나는 사이 한 달째 잊고 물을 주지 않은 화초처럼 시들어버렸다. ‘똑같은 풍경’은 ‘아무것도 없는 풍경’과 다를 바 없었던 것. 결국 내가 할 일이라곤 버스 유리창에 기대어 공상을 하는 일밖엔 남아 있지 않았다. 어렸을 땐 사막 어디쯤에 바벨탑이 있으리라고 상상했지. 아마도 그런 상상의 뿌리엔 가 있었..

썸플레이스 7 - 침묵의 쓸모

세상에서 '침묵'이란 단어가 가장 많이 들어간 책은 무엇일까? 내 짐작엔 막스 피카르트의 일 것이다. 책 제목 탓에 펼치면 백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백지 대신 '침묵'을 주어로 한 문장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문장들 하나, 하나가 시가 되어 날아간다. 피카르트는 말한다. '인간은 자신이 나왔던 침묵의 세계와 자신이 돌아갈 또 하나의 침묵의 세계 - 죽음의 세계 - 사이에서 살고‘ 있으며 '시는 인간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 침묵에서 다른 침묵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를 읽다보면 그가 쓴 문장이 시가 되어 이를 증명하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지상에 아직 침묵이 존재하고 있음을 가장 근래 느끼게 해준 장소는 검룡소였다. 굳이 피카르트가 얘기해주지 않더라도 도시란 이미 소..

썸플레이스 6 - 길 목 조르는 이 누구인가

을 쓴 '브르통'과 을 쓴 '보통'은 작가라는 것 외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노무현'과 '이명박'이 대통령이라는 것 외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듯이. 물론 확고불변한 공통점이 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 말이다. (한 사람은 죽음으로써 ‘영원히 살아있는 대통령’으로 부활했지만, 나머지 한 사람이 그렇게 되기엔 정말, 요원해 보인다) 모든 사람이 죽지만 어떤 사람은 부활하기도 하듯이, 길들 역시 죽기도 하고 부활하기도 한다.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속도의 문화를 느림과 성찰의 문화로, 위로만 오르는 수직의 문화를수평의 문화로 전환하는’ 지리산길을 만들기 위해 사단법인 숲길을 창립했다. 산림청이 사업 지원을 하기로 했다. 다녀간 사람들은 이 길을 '지리산 둘레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2007년 ..

썸플레이스5 - <섬을 걷다>와 대이작도의 풀등

하루 두번 썰물 때,바다 한가운데서거대한 고래처럼솟아오르는풀등. 봄날, 이작도로 건너갔다. 인천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탔다. ‘대한민국의 모든 유인도를 걷겠다’는 작정으로 보길도를 나와 벌써 100여개 섬을 순례한 강제윤 시인과 길동무들이 함께 떠난 여행길이었다. 서해대교 아래를 지나 뱃길로 1시간, 영화 의 로케이션 장소이기도 했던 대이작도에 도착했다. 강제윤 시인을 앞에 세우고 해안도로, 숲길, 산길을 걸었다. 자동차 한 대 오가지 않는 길이었다. 자동차의 방해 없이 걸음에 몸을 맡기고 온전히 걸을 때 생각은 자유를 얻는다. 애쓰지 않아도 자연히 ‘한 생각’이 오고 ’한 생각’이 간다. 온전한 걷기란 단지 다리 근육의 운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잠들어 있는 생각을 깨우고 생각의 폭을 넓히는 정신의..

썸플레이스 4 - 카필라 성에서의 낮잠

내 발 아래에서 함께 잠 들었던 검은 개, 나는 녀석에게 찬타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부처가 탄생 직후 외친 말이라고 한다. ‘염화미소’는 부처와 가섭 사이에 오간 무언의 설법이라고 배웠다. ‘곽시쌍부’는 입멸 후 부처가 관 밖으로 발을 내밀어 보인 유언이다. 그렇게 국정 교과서부터 불교서적에 이르기까지 부처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을 듣고, 배우고, 읽었지만 부처의 전 생애를 알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경기도의 한 암자에서 지내는데 우연찮게 한 권의 책이 손 안으로 들어왔다. 유홍종의 . ‘지금까지 나와 있는 객관적인 자료들을 뽑아서 부처님의 생애를 한 눈에 읽을 수 있도록 정리’한 다큐멘터리 소설이었다. “부처님 얘기는 작가가 써야 재미있을 텐데”라는 노승의 말에 힘을 받아..

썸플레이스 3 - 우리가 버려두고 돌보지 않는 것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어느 순간, 누군가가 말했다. 너는 천 개의 베개를 가졌어. 그 문장이 압정이 되어 길 위에 나를꽂아놓았던 것일까? 참 많은 장소에서 잠을 잤다. 봄날의 호숫가에서 달을 보며 잔적도 있고, 덜컹거리는 우편물 화차에서 잔적도 있고, 사막 한 가운데 은빛으로 흐르는 거대한 강을 올려다보며 잔적도 있다. 그 예언을 곧이곧대로 믿고 천 개의 베개를 다 채우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장소를 다시 찾아가 잠든 적은 거의 없었다. 아니, 딱 한군데 싸리재를 제외하면. 싸리재는 오르는 방향에 따라 두문동재라고도 하는데 태백 고한간 국도 38번 위에 있다. 아니 舊국도 38번 위에 있다. 터널이 뚫리면서 싸리재는 등산객들이나 오가는 길이 되었다. 아니 석탄소비량이 줄어들면서 이미 한적해져 있..

썸플레이스 2 - 인도에서 만난 홈워크라는 이름의 여행객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읽어두면 유익한 책으론 어떤 게 있을까? 이 질문에 여행지의 정보가 담긴 가이드북이나 현지의 생생한 사진들로 워밍업을 시켜주는 여행에세이를 꼽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같은 질문을 내게 한다면 난 오쇼 라즈니쉬의 을 추천하고 싶다. 아, 당신의 여행지는 인도가 아니라고? 그렇다 해도 을 추천하겠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꼼꼼한 ‘정보’나 빈틈없는 ‘일정’이 아니라 여행을 대하는 ‘자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미리 모든 것을 정해놓아야안정이 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난 그들이 ‘숙제’를 하러 온 것인지 ‘여행’을 하러 온 것인지분간이 되지 않아 어리둥절해진다. 그들은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여행, 즉 모험을 하러 온 게 아니었던가? 두려워..

썸플레이스 1 - 크로아티아의 국제부랑자, 막스

내가 아는 어떤 남자는 열차 시간표를 하나도 빠짐없이 외우고 있었다. 세상에서 그를 즐겁게 하는 유일한 것이 바로 열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온종일 역에서 살다시피 하며 열차들이 도착하고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 페터 빅셀의 중 '기억력이 좋은 남자'에서페터 빅셀의 를 처음 읽은 것은 열 여섯의 어느 날이었다. 책 속에는 정말 이상한 사내들로 가득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믿을 수 없다며스스로 '지구는둥글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길을 떠나서는 돌아오지 않는 사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 일상이 지겨워 모든 사물의 이름을 바꿔 부르다가 결국 아무하고도 대화를 할 수 없게 된 사내, 세상을 등지고 발명에 전념하다가 수십 년에 걸쳐 자신이 발명한 발명품이 이미 발명된 텔레비전이라는 것을..

[17] 아무도 아닌 자의 노래, 굿 바이! 친구들

대륙의 서(西)에서 동(東)으로 오는 사이 창 밖의 풍경은 극명하게 달라져 갔다. 사막이 진경 산수화로, 진경 산수화는 어느새 시커먼 연기를 뿜어대는 공장들과 거대한 아파트 공사장으로 바뀌었고, 북경역에서 우리는 내렸다. 한때 자신이 노동자로 일했던 한국으로 향하는 젊은이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었던 파키스탄인은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시장에 물건을 사러 가야 한다면 떠났다. 그는 그 여행길에서 ‘노인들의 모습’ 외에는 한국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 수 있었다. 그가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겪었던 수많은 부당 노동행위와 체불임금에 대한 이야기를 속으로 삼켰다는 것을. 작별의 인사를 건네는 ‘前외국인노동자 인 코리아’의 눈동자 속에 파키스탄, 태국, 베트남, 미얀마, 네팔의 노동자들이 한국 ..

[16] 북경으로 가는 중국대륙횡단 열차.

중국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내가 알고 있는 어떤언어도 통하지 않았다.영어도, 한국어도, 그들은 심지어 영어로 질문을 하는 동양인을 "이봐, 여기 새까만 머리에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녀석이 꼬부랑 말을 하는군" 하고 비웃기까지 했다. 전세계 곳곳의 번화가에 차이나타운이 있고, 15억 이상의 인구가중국어를 사용하고 있으니상대적으로 소수의 사람들이 사용하는다른 언어를사용해야할 필요성은 전혀 느끼지 않는 듯 했다.그들은 여전히 중화, 즉 중국이 이 세계의 중심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전세계 인구의 60억 인구 중 15억이중국인이고 보면, 이 행성에 발 붙이고 사는 사람들 중 네 사람 중 한 사람은 중국인인 셈이고 어쩌면 그들은이 지구란 행성도 중국인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