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_썸플레이스 17

썸플레이스 17 - 여행으로서의 삶

안시내 작 2009년 선물을 받았다. 손수 그린 정말 이쁜 그림이다. 자전거, 나침반, 구두, 책, 연필, 길, 구름, 빗방울, 별 등등 여행을 연상시키는 사물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16살 중학생이 그렸다고 하기엔 정말 놀라운 그림이다. 나는이 친구에게 무엇을 선물할까, 책? 사실 책처럼 고르기 쉬운 선물도 없을 것이다. 책은 받는 이의 취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우니까. 책은 오히려 주는 이의 취향이 깊이 배여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이 책을 너도 좋아하길 바래, 같은. 그러나 내용과 상관없이 좀처럼 선물하기 힘든 책도 있다. 대도시의 초등학생부터 오지마을의 노인들까지 “부자 되세요” 주문에 걸려 있는 이곳에서, 가난을 추구하는 책이라니! 선물하기엔 왠지 거북한 제목의 책이다. Less is More. ..

썸플레이스 16 - 만물에 관한 책으로 이루어진 계단

그땐 정말 인도 바라나시의 가트에 다시 온 듯했다. 경남 고성군을 지나가는 77번 국도에서 ‘공룡발자국 화석지’ 이정표를 지나가는 순간, 샛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떤 냄새(나는 이것을 로드 페로몬이라고 부른다)가 나를 끌어당겼다. 급히 핸들을 꺾었다. 바다로 향한 샛길의 끝, 선착장에 차를 세우고 왼쪽으로 난 언덕을 넘었다. 파도에 의한 침식작용으로 깎여나간 해변의 바위가 계단처럼 층계를 이루고 있었다. 남해안에도 이런 곳이 있었던가. 앞만 보며 걷다가 고개를 숙이는데, 헉! 고라니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박제된 동물마냥, 사지를 뻣뻣하게 뻗은 채 눈 부릅뜨고 죽은 고라니. 며칠이나 지났을까. 뚜렷한 상흔도 없고, 해안가였으니 로드 킬은 아니었으리라. 문득 갠지스 강변의 화장터 풍경이 떠올랐다. 말소리..

썸플레이스 15 - [불가능한 여행기]와 세인트로렌스강

자크 카르티에가 도착한 지 474년 후, 유람선을타고 몬트리올을 지나며인공위성이 없던 시절, 그러니까 GPS도, 비행기도, 여행가이드북도 없던 시절의 여행자는 어떻게 대륙을 횡단하고 대양을 오갔을까? 물론 콜럼부스가 달걀을 깨뜨리기 전부터 지도는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전까지 유럽의 지도라는 것은 부둣가 뱃사람의 허풍보다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지도 제작자들은 항구에서 떠도는 소문들에 기초해 최신판 지도를 만들어 내기 일쑤였고, 어떤 지도 제작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섬을 갖고 싶다는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가상의 섬을 그려 넣기까지 했으니까. 그러나 서해에서 보물선을 건져 올리겠다고 용쓰는 사람들이 21세기에도 존재하듯이, 엉터리 지도와 소문을 믿고 먼 길을 떠나고 바다를 건너는 사람들이 당시엔..

썸플레이스 14 - 여행일정표는 찢어버려라 -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

v 11월의 소슬한 바람이 길을 떠나라고 유혹했어요. 보닛에 쌓인 낙엽을 걷어내고 시동을 걸었죠. 돌아올 시간도, 정처도 정해 두지 않았어요. 그저 남하(南下) 중인 단풍의 꽁무니를 따라가야겠다는 생각 뿐. 그러나 단풍의 꽁무니를 따라붙기도 전, 앞차 꽁무니에 붙어 서고 멈추고 서고 멈추기를 반복해야 했어요. 그래서 케이크의 란 노래가 떠올랐죠.우린 길게 늘어선 차량의 뒤를 따라가고 있어.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라며. 모두 이 길에서 빠져나가고 싶어 하지만 이 길은 끝이 없어. 구부러진 길 위를 돌아 제자리로 올 뿐 - 롱 라인 오브 카, 롱 라인 오브 카, 롱 라인 오브 카...그 후렴구를 백만 번은 반복하고서야 서해안고속도로에 진입했어요. 그러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맹렬한 속도로 추월하는 차량들 사..

썸플레이스 13 - [럼두들 등반기] 인수봉에선 절대 읽지 마세요

선선하고 청명한 가을이다. 등산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이 무렵이면 전세계에서 수많은 트렉커들이 히말라야 산맥으로 몰려든다. 특히 최근 한국에서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의 인기는 대단하다. 오죽하면 인천~카트만두 직항로가 열렸을까? 그러나 이 무렵 에베레스트나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는 건 거의 북한산을 오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빨리 안 가면 화살코로 똥침을찔러버리겠다는 뒷사람에게 밀리고, 앞 사람의 엉덩이에 거의 내 코를 처박다 시피하면서 올라가는 동안 하산하는 한국인들을 향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또 안녕하세요. 그러다 보면 하루가 다 간다. 물론 총길이 2400㎞에 이르는 히말라야 산맥엔 여러 갈래 트레킹 코스가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높이’와..

썸플레이스 12 - 꿈꾸는 실험실, 예수원

기독교인도 아닌 내가 을 방문하게 된 건 엉뚱하지만 ‘크리스티아니아’ 때문이었다. 크리스티아니아는 기존 질서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코펜하겐의 버려진 군병영지에 모여 살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공동체. 그들은 "인간은 법이 아니라 상식에 기초한 직접민주주의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이상을 현실 세계에서 구현하는 실험을 해왔다. 그런데 최근 덴마크 정부는 아파트 단지를 짓기 위해 크리스티아니아를 철거하기로 했다. 그 뉴스를 접하고 나는 우울해졌다. 그러나 한편 호기심이 생겼다. 비록 남한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라고 일컫지만 그 틀을 벗어난 사람들이 있듯 또 다른 삶, 또 다른 사회를 꿈꾸는 실험실도 있지 않을까? 인터넷을 통해 ‘공동체’를 찾아보았다. 전국 곳곳에서..

썸플레이스 11 - 내 다시는 이 시를 읊나 봐라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야영장, 숲 속 오두막에서 맞이한 아침. 침낭 밖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잉잉거리는 소리가 그저 워크맨의 멈춤 버튼을 누르지 않고 잠든 탓이라 여기며 뒤척거릴 때였다. 곁에 누워 있던 폴란드 친구, 폴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R, 일어났어?” “응” “문제가 발생했어!” “전쟁이라도 터졌어?”(침낭을 후딱 뒤집고 일어나려는 찰나) “안 돼! 일어나지 말고 천천히 침낭 밖으로 고개만 내밀고 봐.” 좀처럼 긴장하지 않는 폴의 목소리가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구나, 하고 짐작은 했지만 침낭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바라본세상은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잉잉 잉잉 천장부터 사방 벽에 수천 마리 벌들이 달라붙어 있었고, 수백 마리 벌들이 잉잉거리며 천장, 벽,..

썸플레이스 10 - 오리배 타는 사람들

산정호수(포천시 영북면 산정리에 축조된 관개용 저수지로, 지금은 서울근교 유원지로 유명해졌다)에서 이동 막걸리를 마시다가 불현듯 두 사내가 떠올랐다. 아니, 두 사내의 작품이 떠올랐다. 하나는 켄 로치의 고 하나는 박민규의 단편집 에 수록된 이다. 두 작품을 이어준 것은 퐁당 퐁당 호수 위를 오가고 있는 오리배였다. 아직 오리배가 있어? 라고 물을 지도 모르지만 아직 오리배가 있다. 타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사실 이름만 OO항공사일 뿐, 오리배를 타는 사람들은 무척 많다.) 근데 오리배가 어떻게 좌파 감독으로 알려진 켄 로치의 영화와 레게 머리를 한 소설가의 작품을 이어주는지, 설명하려면 좀 길다. 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쓰나미 속에서 발생하는 이주노동자 문제를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다. 직장 상사의 ..

썸플레이스 9 - 황홀한 제주도의 밤

아부오름의 분화구에서 찰칵. 분화구 너머로 또 다른 오름들이 물결치고 있다 아이고, 폴대를 안 갖고 올라왔어! 한탄을 한다. 어이구 네가 하는 일이 그렇지, 동행한 K로부터 핀잔이 날아든다. 그래 내가 하는 일이 이렇지, 가슴을 치며 자책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텐트 치고 일박을 하자며 텐트·매트·침낭 등등을 다 싸짊어지고 올랐는데 산 아래 세워둔 차 트렁크 안에 텐트 폴대를 놓고 왔으니. 영락없이 비박을 해야 할 판이다. 결국 나는 이마에 랜턴을 매달고서 야간 산행을 감행하기로 했다. 하긴 오르내리는 데 고작 2시간이면 되는 봉우리니까. 이 봉우리를 오르내린 게 벌써 네 번째다. 그러니 이번에 하산 즉시 다시 오르면 다섯 손가락을 채우게 된다. 해발 382m에 불과한 이 봉우리를 사람들은 다랑쉬 오름..

썸플레이스 8 - [바빌론의 탑]과 카비르 사막

표면 형성 물질에 따라 여러 종류의 사막이 있다는 걸 스물이 넘어서야 알았다면, 사막이 남극과 북극에도 있다는 걸 서른이 넘어서야 알았다면 너무 무식한 걸까? 이란의 카비르 사막 언저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모래사막은 아니었지만 분명 식물이라곤 자랄 수 없는 자갈과 돌로 뒤덮인 땅이었다. 처음에는 드디어 사막을 보게 되었다고 좋아라 했다. 그러나 첫 경험의 환희는 다음날도 같은 풍경을 지나는 사이 한 달째 잊고 물을 주지 않은 화초처럼 시들어버렸다. ‘똑같은 풍경’은 ‘아무것도 없는 풍경’과 다를 바 없었던 것. 결국 내가 할 일이라곤 버스 유리창에 기대어 공상을 하는 일밖엔 남아 있지 않았다. 어렸을 땐 사막 어디쯤에 바벨탑이 있으리라고 상상했지. 아마도 그런 상상의 뿌리엔 가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