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_썸플레이스

썸플레이스 9 - 황홀한 제주도의 밤

삐노 2009. 7. 30. 15:52

아부오름의 분화구에서 찰칵. 분화구 너머로 또 다른 오름들이 물결치고 있다

아이고, 폴대를 안 갖고 올라왔어! 한탄을 한다. 어이구 네가 하는 일이 그렇지, 동행한 K로부터 핀잔이 날아든다. 그래 내가 하는 일이 이렇지, 가슴을 치며 자책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텐트 치고 일박을 하자며 텐트·매트·침낭 등등을 다 싸짊어지고 올랐는데 산 아래 세워둔 차 트렁크 안에 텐트 폴대를 놓고 왔으니. 영락없이 비박을 해야 할 판이다. 결국 나는 이마에 랜턴을 매달고서 야간 산행을 감행하기로 했다. 하긴 오르내리는 데 고작 2시간이면 되는 봉우리니까.


이 봉우리를 오르내린 게 벌써 네 번째다. 그러니 이번에 하산 즉시 다시 오르면 다섯 손가락을 채우게 된다. 해발 382m에 불과한 이 봉우리를 사람들은 다랑쉬 오름이라고 부른다. 그래, 이곳은 제주도. 제주도엔 한라산을 중심으로 무려 360개가 넘는 오름(기생화산)이 있다. 하루 하나씩만 올라도 1년이 걸린다. 제주도의 묘미는 해안도로도 이국적 풍경도 아니고 오름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제주도에서 오름을 오르지 않은 사람은 제주도를 보지 못한 것과 같다고.

처음 다랑쉬 오름을 올랐을 때 나는 겉과 속이 판이하게 다른 모습에 기겁을 했다. 밖에서 본 모습은 봉긋하게 누운 여자의 젖가슴 같은데, 오르고 보면 가운데 움푹 들어간 분화구를 품고 있어 마치 대지의 자궁 같다. 투둑. 깜짝이야, 어둠 속에서 풀을 뜯던 사슴이 달아난다. 제주도엔 정말 사슴이 많다. 내가 일하던 목장만 해도 처음엔 300마리에 달하는 사슴을 길렀는데 반 넘게 도망을 갔다. 목책을 치고 철망을 둘러도 녀석들은 자유를 찾아 어떻게든지 탈출을 한다. 빠삐용이 따로 없다.

육지를 탈출한 빠삐용, 김영갑은 제주도 풍광에 반해 1985년부터 아예 제주도로 내려와 사진작업을 하며 지냈다. 어쩌면 그에게 제주도는 <알 포인트> 같은 곳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제주도 오름에 매혹당한 자, 돌아갈 수 없다.’ 그는 두모악 갤러리의 문을 연 지 3년, 2005년 제주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부음을 듣던 여름, 나는 제주 바닷가에서 목조펜션을 짓고 있었다. 일이 끝나고 뭍으로 돌아와서도 제주도 오름이 그리울 때면 그가 남긴 사진에세이집을 펼쳐보곤 했다.

선이 부드럽고 볼륨이 풍만한 오름들은 늘 나를 유혹한다. 유혹에 빠진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 달 밝은 밤에도, 폭설이 내려도, 초원으로 오름으로 내달린다. 그럴 때면 나는 오르가슴을 느낀다. 도시보다는 자연에서, 낮보다는 밤에, 나의 성감은 자극을 받는다. -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중

보름달이 땡그랑 땡그랑 구르자, 용눈이 오름이 꿈틀꿈틀하고, 수평선 위로 오징어잡이 배들의 불빛들 반짝이고, 무릎과 무릎 사이로 반딧불이가 지나간다. 1시간이 지나 나는 주차장에 도착했다. 자, 이제 트렁크 문만 열면…. 근데, 호주머니 속에 있어야 할 차열쇠가 없다. 두고 내려온 것이다. 한심스럽다는 듯 쳐다볼 K의 눈빛이 선하다. 달밤에 하릴없이 오름을 오르내린 내 꼴이라니. 결국 바람 부는 다랑쉬 오름에서 보름달이 머리 위로 지나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올려다보며 잠들 수밖에 없었다. 칠칠치 못한 건망증 탓에 맛본, 참으로 황홀한 제주도의 밤. 이어도가 따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