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_썸플레이스

썸플레이스 10 - 오리배 타는 사람들

삐노 2009. 9. 16. 00:45


산정호수(포천시 영북면 산정리에 축조된 관개용 저수지로, 지금은 서울근교 유원지로 유명해졌다)에서 이동 막걸리를 마시다가 불현듯 두 사내가 떠올랐다. 아니, 두 사내의 작품이 떠올랐다. 하나는 켄 로치의 <자유로운 세계>고 하나는 박민규의 단편집 <카스테라>에 수록된 <아, 하세요 펠리컨>이다. 두 작품을 이어준 것은 퐁당 퐁당 호수 위를 오가고 있는 오리배였다. 아직 오리배가 있어? 라고 물을 지도 모르지만 아직 오리배가 있다. 타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사실 이름만 OO항공사일 뿐, 오리배를 타는 사람들은 무척 많다.) 근데 오리배가 어떻게 좌파 감독으로 알려진 켄 로치의 영화와 레게 머리를 한 소설가의 작품을 이어주는지, 설명하려면 좀 길다.

<자유로운 세계>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쓰나미 속에서 발생하는 이주노동자 문제를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다. 직장 상사의 성추행을 뿌리친 계약직 앤지가 해고당하고, 그녀는 '이젠 명령받는 사람이 아니라 명령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아들과 함께 살 집을 마련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가진 싱글맘 앤지, 그녀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소개하는 인력보급소를 직접 차리고, 자신의 미모를 적절이 이용해 승승장구해 나간다. 그러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 엔지는 점점 악인으로 변해간다. 이주노동자들의 월급을 떼먹고, 불법이주노동자들의 숙소를 단속반에게 고발하는.

<아, 하세요 펠리컨>은 문을 연다, 코끼리를 넣는다, 문을 닫는 방법으로 미국과 중국까지 냉장고 속에 넣어버리는 <카스테라>급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황당한 소설이다. 전문대를 졸업했지만 토익도 900점이 넘고, 영어회화도 중급 이상에 동아리 회장까지 역임한 청년이 주인공이다. 일흔 세 곳에 원서를 넣고 일흔 세 곳에서 고배를 마신 후 9급 공무원 준비를 하며 유원지에서 일하고 있다. 칠 벗겨진 오리배와 고장난 두더지잡기가 전부인 유원지의 유일한 직원. 그곳에도 사람들은 온다. 불륜의 중년커플, 방글라데시에서 온 노동자 부부, 규정을 꼼꼼히 따지는 쌍둥이 엄마, 중소기업을 운영하다 부도나서 도피 중이던 남자, 기타 등등. 여기까진 아주 현실적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낯 선 오리배들이 철새 군락처럼 저수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오리배 안엔 사람들이 타고 있다. 남미에서 중국으로 일자리를 찾아가다 태풍 때문에 길을 잃은 사람들, 이란다. 이동수단은 오리배. 그 후 오리배를 타고 미국으로, 일본으로, 북경으로 오가는 각국의 ‘오리배 시민연합’ 사람들을 만난다. 말하자면, 이주 노동자들이다.

그래서다. 산정호수에서 오리배를 보다가 <자유로운 세계>와 <아, 하세요 펠리컨>이 동시에 떠오른 것은. 북쪽으론 명성산, 남쪽으론 관음산, 산들로 둘러싸인 호수라 날도 빨리 저문다. 놀이공원의 회전목마도 멈추고, 마지막 남은 한 척의 오리배가 선착장으로 들어온다. 햇볕에 검게 그을린 청년이 밧줄을 들고 서 있다. 반대편 호수 기슭 어디쯤 방글라데시에서 온 노동자가 박노해의 시집을 읽다가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끄덕끄덕, 선착장에 묶여 있는 오리배들이 주억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