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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플레이스 12 - 꿈꾸는 실험실, 예수원

삐노 2009. 10. 12. 03:29


기독교인도 아닌 내가 <예수원>을 방문하게 된 건 엉뚱하지만 ‘크리스티아니아’ 때문이었다. 크리스티아니아는 기존 질서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코펜하겐의 버려진 군병영지에 모여 살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공동체. 그들은 "인간은 법이 아니라 상식에 기초한 직접민주주의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이상을 현실 세계에서 구현하는 실험을 해왔다. 그런데 최근 덴마크 정부는 아파트 단지를 짓기 위해 크리스티아니아를 철거하기로 했다. 그 뉴스를 접하고 나는 우울해졌다. 그러나 한편 호기심이 생겼다. 비록 남한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라고 일컫지만 그 틀을 벗어난 사람들이 있듯 또 다른 삶, 또 다른 사회를 꿈꾸는 실험실도 있지 않을까? 인터넷을 통해 ‘공동체’를 찾아보았다.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실험들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리고 중세 수도원 같은 <예수원>의 모습과 마주치는 순간 마음이 동했다. 방문 예약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태백 하사미 분교 앞에 이르자 <예수원> 이정표가 방향을 가리켰다. 오솔길의 끝에서 커다란 돌비석이 나를 맞이했다. 이렇게 씌어 있었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 - 레 25:23 中> 산비탈을 따라 늘어선 건물들. 돌로 외벽을 쌓고 갈대를 엮어 놓은 지붕. 영화 속에서나 본 중세 유럽 마을로 들어선 것만 같았다. 간단한 신상기록을 하고 손님부 담당자의 뒤를 따라 방문자 숙소로 올라갔다. 다다미가 깔려 있는 방안에는 열 명 가량의 방문객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2박 3일간 그곳에서 지냈다. 하루 세 번 다함께 식사와 기도를 하고, 침묵시간엔 오솔길을 따라 숲을 거닐었다. 산책에서 돌아오면 벽난로가 있는 도서관에서 <진보와 빈곤>을 읽었다. 예수원에서 이뤄지는 실험의 토대는 <성경>과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이었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부는 쌓이고 사회는 진보하는데 인간의 삶은 왜 더 빈곤해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했던 19세기 미국의 사상가. 그는 빈곤의 가장 큰 원인이 토지사유제에 있다고 여겼다. 전국민이 낸 세금으로 건설되는 철도, 도로, 항만 등등. 사회기반시설의 확충으로 사회는 발전하지만 그로 인한 토지가격 상승의 혜택은 땅을 가진 자들에게 돌아간다는 것.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그의 저서는 톨스토이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부활>에서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던 네플류도프는 헨리 조지의 이름과 주장, ‘지대공유제’를 명시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예수원에선 매일 점심식사 후에 중보기도를 했다. 수능합격, 사업번창이 아니라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은 먼 나라의 이웃들을 위해, 용산에서 죽은 이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기도내용은 무척 구체적이었다. 아마도 인터넷과 구독신문인 <한겨레>때문이었으리라. 나는 하나님이 그 기도를 모두 들어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비록 이곳 사람들이 외진 데서 살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에서 살고 있는 건 TV, 신문을 통해 매일같이 뉴스를 접하지만 바쁜 일상에 쫓겨 이웃의 고통을 남의 일처럼 여기며 사는 우리들이 아닐까? 2박 3일을 보내고 나오는 길, 물음표 하나가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