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_썸플레이스

썸플레이스 16 - 만물에 관한 책으로 이루어진 계단

삐노 2009. 12. 6. 00:35


그땐 정말 인도 바라나시의 가트에 다시 온 듯했다. 경남 고성군을 지나가는 77번 국도에서 ‘공룡발자국 화석지’ 이정표를 지나가는 순간, 샛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떤 냄새(나는 이것을 로드 페로몬이라고 부른다)가 나를 끌어당겼다. 급히 핸들을 꺾었다. 바다로 향한 샛길의 끝, 선착장에 차를 세우고 왼쪽으로 난 언덕을 넘었다. 파도에 의한 침식작용으로 깎여나간 해변의 바위가 계단처럼 층계를 이루고 있었다. 남해안에도 이런 곳이 있었던가. 앞만 보며 걷다가 고개를 숙이는데, 헉! 고라니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박제된 동물마냥, 사지를 뻣뻣하게 뻗은 채 눈 부릅뜨고 죽은 고라니. 며칠이나 지났을까. 뚜렷한 상흔도 없고, 해안가였으니 로드 킬은 아니었으리라. 문득 갠지스 강변의 화장터 풍경이 떠올랐다.

말소리가 들렸다. 중년 남녀가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에게 소리쳤다. “이쪽으로 올라오지 마시고 저쪽으로 둘러가세요, 이 아래 사체가 있어요.” 돌아서는데 여자의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엄마!” 미리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심장마비로 그 자리에서 죽고도 남을 법한 비명이었다. 길을 걸었다. 모래톱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막상 올라서서 보니, 길고 긴 돌계단이었다. 수 만권의 책을 해안선을 따라 쌓아놓은 것 같았다. 변산반도의 채석강을 닮긴 닮았는데 더 길고, 대신 더 낮았다. 나는 자연스레 형성된 돌계단이 굽이를 이루며 사라지는 지점을 가늠한 뒤, 장구한 세월이 만들어 놓은 계단 위에 앉았다. 파도가 한번 치고, 발아래 움푹 움푹 파인 자국들 위로 바닷물이 고였다. 공룡 발자국 화석이구나. 시선이 먼 바다를 건넜다. 가물가물 조선소 크레인이 아득하게, 우뚝 서 있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서 광막한 시간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태초, 빅뱅, 공룡의 시대, 인류의 등장, 기계의 등장 그리고 현재.

그런 소설이 있다. 태초부터 현재까지, 원시수프부터 만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를 다룬 소설. 프랑스에서 8주간 베스트셀러 1위였다는 이 책을 두고 국내 독자들은 대체 뭐 이딴 소설이 다 있는가, 하고 불평을 했다던가. 아마도 그들은 모름지기 소설은 주인공이 있고, 사건이 있고, 갈등이 있고, 결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리다. 프랑스 철학자 장 도르메송이 쓴 이 소설의 주인공은 우주 그 자체다. 어떤 이는 첫 문장 '만물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 만물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과 접하는 순간 돌계단에서 거대한 시간 속으로 빠져들던 나처럼 몰입할 수도 있고, ‘제1장 - 존재’를 다 읽기도 전에 책을 던져버릴 수도 있으리라. 거의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잖아! 하고.

우주 그 자체가 주인공인 소설을 읽으며 다시 그 곳에 가고 싶은 생각을 했다. 굳이 눈으로 마지막 문장까지 읽지 않더라도 ‘만물’에 관한 책을 쌓아놓은 것 같았던 그 돌계단 위에 앉아 있으면 ‘만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만물, 태초, 고독, 시간, 광막한 공간, 장구한 세월, 신, 영혼, 물질, 불, 공기, 물, 사랑.......그러다 해지면 일어나야 되리,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 같은 가련함을 머금고. ‘너희들은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에 대해서처럼 만물에 대해, 너희들은 결코 아무 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