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_썸플레이스

썸플레이스 14 - 여행일정표는 찢어버려라 -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

삐노 2009. 11. 10.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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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소슬한 바람이 길을 떠나라고 유혹했어요. 보닛에 쌓인 낙엽을 걷어내고 시동을 걸었죠. 돌아올 시간도, 정처도 정해 두지 않았어요. 그저 남하(南下) 중인 단풍의 꽁무니를 따라가야겠다는 생각 뿐. 그러나 단풍의 꽁무니를 따라붙기도 전, 앞차 꽁무니에 붙어 서고 멈추고 서고 멈추기를 반복해야 했어요. 그래서 케이크의 <롱 라인 오브 카>란 노래가 떠올랐죠.우린 길게 늘어선 차량의 뒤를 따라가고 있어.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라며. 모두 이 길에서 빠져나가고 싶어 하지만 이 길은 끝이 없어. 구부러진 길 위를 돌아 제자리로 올 뿐 - 롱 라인 오브 카, 롱 라인 오브 카, 롱 라인 오브 카...그 후렴구를 백만 번은 반복하고서야 서해안고속도로에 진입했어요. 그러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맹렬한 속도로 추월하는 차량들 사이에서 운전하는 것도 고된 일, 나는 이내 지쳐버렸어요. 결국 국도로 빠져나갔죠. 만경들판 지나 부안, 채석강, 모항, 능가산, 내장산, 담양, 순창, 남원, 함양, 합천, 운문.......

해 지면 모래사장에 세상에서 가장 얇은 집, '텐트'를 치고 잠들거나, 산마루 위로 돋는 달을 바라볼 수 있는 공터에 자리 펴고 달을 기다렸어요. 해 뜨면 빨간 사과 한 조각 베어 물고 길을 떠났죠. 채석강이나 내장산처럼 명소도 나쁘진 않았지만 벚나무, 양버즘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 늘어선 지방도를 따라가는 길이 참 좋았어요. 고개를 넘다가 은둔하는 절경을 만나면 헐떡이는 차를 세우고 함께 풍경으로 목을 축였죠. 무엇보다 24번 국도를 따라 남원시 이백면 양가리에서 운봉읍 장교리로 넘어가는 '여원치'와 전라북도에서 경상남도로 넘어가는 '팔량치', 1084번 지방도를 따라 함양에서 거창으로 넘어가는 '춘전치', 1034번 지방도를 따라 이어지는 '덕갈산' '매봉산' 의 단풍이 좋았어요. 1034번 지방도에선 갑작스레 나타난 저수지의 풍광에 취해 한참을 머물렀어요. 이름 모를 저수지를 따라 늘어선 아홉 그루 감나무엔 아무도 따지 않은 감들이 알알이 맺혀 있었어요,주홍빛 물방울이 금방이라도 떨어지려는 찰나처럼.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입안이 달콤해졌더랬죠.

<생활의 발견>을 쓴 임어당은 일찍이‘여행의 즐거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참된 여행이 되기 위해 피해야 할 세 가지를 알려주었어요. ‘첫째는 정신 향상을 위한 여행을 피해라 - (여기서 정신 향상이란 누가 몇 년에 태어나 몇 년에 죽었다는 식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말해요) 휴가 동안만이라도 긴장을 풀고 휴양을 해야만 한다.’ ‘둘째는 후일의 이야기 거리를 얻기 위한 여행을 피해라 - 사진 찍기에 바빠서 명소를 볼 여가가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떠나기 전에 완전한 일정표를 만들고 그것을 끝까지 철저하게 지키는 여행을 피해라 - 시계에 묶이고 달력에 구속된다.’ 그런 그는 참된 여행이 무엇인가도 알려주었죠.

여행한다는 것은 ‘방랑’한다는 것이다. 방랑이 아닌 것은 여행이라고 할 수 없다. 여행의 본질은 의무도 없고, 정해진 시간도 없고, 소식도 전하지 않고, 호기심 많은 이웃도 없고, 이렇다 할 목적지도 없는 나그네길이다. 좋은 여행자는 자기가 어디로 갈 것인지 모르고, 훌륭한 여행자는 자기가 어디에서 왔는지조차도 모른다. 아니, 자기 이름마저도 모른다.

아직 내 이름을 버리지 못한 나는 열 장의 사진을 찍고, 이렇게 한 편의 글을 쓰고 마는군요. 길 위에서 아홉 장을 지우고 한 장을 남겨요. 11월 단풍의 꽁무니를 쫒다 마주친 1034번 지방도의 풍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