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_썸플레이스

썸플레이스 11 - 내 다시는 이 시를 읊나 봐라

삐노 2009. 10. 6. 20:51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야영장, 숲 속 오두막에서 맞이한 아침. 침낭 밖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잉잉거리는 소리가 그저 워크맨의 멈춤 버튼을 누르지 않고 잠든 탓이라 여기며 뒤척거릴 때였다. 곁에 누워 있던 폴란드 친구, 폴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R, 일어났어?” “응” “문제가 발생했어!” “전쟁이라도 터졌어?”(침낭을 후딱 뒤집고 일어나려는 찰나) “안 돼! 일어나지 말고 천천히 침낭 밖으로 고개만 내밀고 봐.” 좀처럼 긴장하지 않는 폴의 목소리가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구나, 하고 짐작은 했지만 침낭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바라본세상은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잉잉 잉잉 천장부터 사방 벽에 수천 마리 벌들이 달라붙어 있었고, 수백 마리 벌들이 잉잉거리며 천장, 벽, 유리창 할 것 없이 온몸을 부딪치며 좁은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젠장, ‘벌이 잉잉대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한 녀석이 대체 누구였어?

나 일어나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외 엮어 진흙 바른 오막집 짓고/ 아홉 이랑 콩을 심고, 꿀벌 통 하나 두고/ 벌들 잉잉대는 숲 속에 홀로 살으리// 또 거기서 얼마쯤의 평화를 누리리, 평화는 천천히/ 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리 우는 곳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 한밤은 희미하게 빛나고, 대낮은 자줏빛으로 타오르며,/ 저녁엔 홍방울새 날개 소리 가득한 곳.

그 와중에 아일랜드 출신,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이니스프리 호수섬>이 떠올랐다. 정현종 시인이 번역한 <첫사랑>에 수록된 그 시를 늘 읊조리곤 했으니까. 예이츠는 월든 호숫가에서 지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본받아 아일랜드 로크길 호수의 작은 섬, 이니스프리에서 살고 싶어 했다지. 그러나 한가롭게 전원생활을 동경하는 시나 떠올릴 사정이 아니었다. 침낭으로 다시 얼굴을 덮고 벌이 잉잉대듯 폴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몰라. 벌이 다 빠져나가면 널 깨우려고 했는데 벌써 1시간째 저래. 깨진 창으로 계속 들어와. 저건 그냥 벌이 아냐, 말벌이라고. 잘못하다간 우린 여기서 죽을 수도 있어” “사람들이 올 때까지 기다릴까?” “누가 오겠어?” “그럼 소릴 지를까?” “캠프 사무실까지 들리겠어? 게다가 그 소리 때문에 말벌이 달려들면?” 결국 ‘벌이 잉잉대는 곳’에서 탈출하기 위한 묘책을 강구한 끝에 도달한 결론은 - 침낭 안에서 최대한 빨리 뛰쳐나갈 수 있는 자세를 취한 후, 동시에 달려 나가는 것.

“자아, 하나, 둘, 셋….”

침낭으로 온몸을 감싸고, 문을 열어젖히고, 사정없이 내달렸다. 스무 걸음 정도 내달렸을무렵 살았구나, 하고 안도를 했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나는 마치 총알이 아킬레스건을 관통한 듯한 통증을 느끼며 풀숲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내 생애 처음 말벌에게 쏘인, 그래 ‘첫 경험’이었다. 더듬더듬 침낭 밑으로 겨우 몸을 숨겼다. 잉잉거리는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한참이 지나 폴이 캠프 직원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는 곧 벌떼 소탕작전에 들어갈 거라고 말했다. 근데 왜 말벌이 우리 오두막으로 몰려든 것일까? 말벌도 톰 웨이츠를 좋아하는 것일까? 지난밤 내내 틀어놓은 음악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는 예이츠의 <이니스프리 호수섬>을 읊조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뭐, 벌이 잉잉거리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