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_썸플레이스

썸플레이스 8 - [바빌론의 탑]과 카비르 사막

삐노 2009. 7. 22. 16:41

표면 형성 물질에 따라 여러 종류의 사막이 있다는 걸 스물이 넘어서야 알았다면, 사막이 남극과 북극에도 있다는 걸 서른이 넘어서야 알았다면 너무 무식한 걸까? 이란의 카비르 사막 언저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모래사막은 아니었지만 분명 식물이라곤 자랄 수 없는 자갈과 돌로 뒤덮인 땅이었다. 처음에는 드디어 사막을 보게 되었다고 좋아라 했다. 그러나 첫 경험의 환희는 다음날도 같은 풍경을 지나는 사이 한 달째 잊고 물을 주지 않은 화초처럼 시들어버렸다. ‘똑같은 풍경’은 ‘아무것도 없는 풍경’과 다를 바 없었던 것. 결국 내가 할 일이라곤 버스 유리창에 기대어 공상을 하는 일밖엔 남아 있지 않았다.


어렸을 땐 사막 어디쯤에 바벨탑이 있으리라고 상상했지. 아마도 그런 상상의 뿌리엔 <바벨2세>가 있었을 거야. ‘김동명’으로 둔갑한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만화는 환상과 실재를 혼동하는 소년 특유의 재능에 힘입어 사막을 사라진 바벨탑이 숨겨져 있는 장소로 여기게 만들었지. 모래폭풍 한가운데 거대한 건축물. 나이가 들면서 바벨탑이 각 시대의 예술가, 고고학자, 과학자에게 수많은 호기심과 영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브뤼헐의 <바벨탑>, 콜데바이의 지구라트 발굴,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등등.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바벨탑에 대한 생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책 한 권을 선물로 받았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연애소설쯤 되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가의 휘황찬란한 이력은 제목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에스에프(SF)문학계에서 가장 권위를 자랑하는 휴고상, 네뷸러상, 존 캠벨 기념상, 로커스상을 휩쓴 작가. 여덟 개의 중단편 중 첫 편, 제목을 보는 순간 눈과 활자 사이에 파지직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바빌론의 탑>.

일찍이 내가 알고 있던 에스에프소설이 아니었다. 배경은 미래가 아닌 과거였고, 공상과학적인 사물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고대인의 ‘상상’을 ‘실재’라고 상정한 뒤 새로운 세계가 구축되고 있었다. 바빌론의 탑은 대홍수를 일으킨 적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수량을 담고 있는 ‘천장’과 ‘지상’을 잇는 팽팽한 밧줄 같은 것. 이란에서 온 힐라룸은 천장을 뚫기 위해 탑의 꼭대기로 올라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어떤 이들은 탑에서 태어나 탑에서 죽고, 평생 지상을 밟지 않은 이들도 있다. 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고, 길. 이윽고 그는 천장에 도착하고 천장을 뚫던 중 엄청난 양의 물에 휩쓸린다. 그가 천신만고 끝에 빠져 나온 터널 밖의 세상. “그는 탑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할 작정이었다. 이 세계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를 그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이 소식은 <올드 보이>의 반전쯤은 무릎 꿇게 하는 스포일러가 될 테니 그로부터 직접 들으시길.)

국내에도 110층이 넘는 초고층 빌딩들이 세워진다는 소식을 자주 듣게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미 초고층 빌딩에서 살고 있다.대형할인점에선전화로 주문한 물건을 배달해주고, 대신맨들이 각종 심부름을 해준다. 주상복합빌딩의 경우엔 영화관부터 음식점까지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우리들은 이미 바빌론의 탑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도시가 왠지 콘크리트 사막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