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_썸플레이스

썸플레이스 17 - 여행으로서의 삶

삐노 2009. 12. 21. 14:32

안시내 작 <여행 - 썸플레이스> 2009년

선물을 받았다. 손수 그린 정말 이쁜 그림이다. 자전거, 나침반, 구두, 책, 연필, 길, 구름, 빗방울, 별 등등 여행을 연상시키는 사물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16살 중학생이 그렸다고 하기엔 정말 놀라운 그림이다. 나는이 친구에게 무엇을 선물할까, 책? 사실 책처럼 고르기 쉬운 선물도 없을 것이다. 책은 받는 이의 취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우니까. 책은 오히려 주는 이의 취향이 깊이 배여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이 책을 너도 좋아하길 바래, 같은. 그러나 내용과 상관없이 좀처럼 선물하기 힘든 책도 있다. <자발적 가난> 대도시의 초등학생부터 오지마을의 노인들까지 “부자 되세요” 주문에 걸려 있는 이곳에서, 가난을 추구하는 책이라니! 선물하기엔 왠지 거북한 제목의 책이다.

Less is More. <자발적 가난>의 원제목이다. 어쩌면 원제목을 그대로 쓰거나, 직역해서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라고 했다면 더 많이 팔리지 않았을까? 물론 직역하면 너무 심심해서 수많은 자기계발류 책들 사이에 파묻혀 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그렇더라도 출판사 스스로 '자발적 가난'을 추구하지 않고서야 이런 제목을 사용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선물하기엔 거북한 제목이지만 알맹이까지 거북하진 않다. 골디언 밴던브뤼크가 엮은 이 책은 스스로를 위해서 그리고 인류를 위해서 '자발적 가난'을 외친 이들의 '말씀들'을 한 자리에 모은 보물창고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과 노자, 부처, 예수를 거쳐 20세기의 니어링, 아인슈타인, 간디, 에크하르트에 이르기까지. 근데 이 책이 여행 혹은 썸플레이스와 관련이 있나?

삶은 여행이다. 65억 인류가 발붙이고 사는 지구가 시속 11만 킬로미터로 우주를 여행하고 있는 행성이라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삶은 여행이다'라는 정의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어떤 이는 '여행은 삶이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번 여행을 다녀오면 한 생을 산 것과 같다는 의미다. 그러고 보면 나도 지구란 행성에서 많지는 않지만 여러 생을 산 셈이다. 그리고 여러 생을 경험하면서 '짐을 최소한으로 줄여라'는 여행철칙이 상투적이지만 '진리'라는 걸 깨달았다. 짐이 가벼울수록(Less) 더 많은 것(More)을 듣고, 보고, 느낄 수 있었으니까. 아예 빈손으로 여행을 할 순 없지만 되도록이면 엠피쓰리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기보다는 가로수나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를 듣고, 카메라로 명소나 풍경을 촬영하기 보다는 두 눈으로 그냥 본다. 진정 감동적인 대화는 굳이 노트북에 기록하거나 녹음기에 저장해두지 않아도 기억 속에 남는다. 물론 내 머리 속에도 지우개가 있어서 많은 것들이 지워진다. 그러나 기록으로 박제되지 않은 어떤 장소, 사람, 냄새, 소리는 불멸의 기억으로 남았다.

<자발적 가난>의 7장 모든 것을 버리고 여행자로 살아가라는‘삶은 여행이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발걸음이 가벼울수록 여행도 가볍듯, 삶의 여정에서 가난함으로 필요를 줄인 사람은 더 행복하고, 부의 무게 아래 신음하지 않는다. - 펠릭스,현명한 사람이라면 오로지 짐을 무겁게만 하는 유복함을 두려워할 것이다. - 에머슨,온갖 것을 다 꾸린 짐을 들고 비틀거리는 한 이주자를 만났을 때, 그 짐이 그가 가진 재산의 전부라서가아니라 그 많은 짐을 그가 다 운반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그가 불쌍했다. 만약 짐을 가지고 가야 한다면, 나는 짐을 최대한 가볍게 할 것이며 그것이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가장 현명한 것은 짐을 아예 없애는 것이리라 - 소로우 등등.7장뿐만 아니라 총10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알맹이를 통해 지구별 선배들은 진정한 여행의 기술을 알려준다. ‘자발적 가난’이야말로 인류가 이 행성을 더 풍요롭게 여행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2009년 12월 24일 (목)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39510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