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_썸플레이스

썸플레이스 6 - 길 목 조르는 이 누구인가

삐노 2009. 6. 1. 15:34



<걷기 예찬>을 쓴 '브르통'과 <여행의 기술>을 쓴 '보통'은 작가라는 것 외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노무현'과 '이명박'이 대통령이라는 것 외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듯이. 물론 확고불변한 공통점이 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 말이다. (한 사람은 죽음으로써 ‘영원히 살아있는 대통령’으로 부활했지만, 나머지 한 사람이 그렇게 되기엔 정말, 요원해 보인다) 모든 사람이 죽지만 어떤 사람은 부활하기도 하듯이, 길들 역시 죽기도 하고 부활하기도 한다.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속도의 문화를 느림과 성찰의 문화로, 위로만 오르는 수직의 문화를수평의 문화로 전환하는’ 지리산길을 만들기 위해 사단법인 숲길을 창립했다. 산림청이 사업 지원을 하기로 했다. 다녀간 사람들은 이 길을 '지리산 둘레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2007년 시범구간 개통을 시작으로 2011년 전구간이 개통되면 300여 킬로미터에 이를 지리산길은 한 지점에서 한 지점을 잇는 선(線)형의 길이 아니라, 지리산 둘레를 한 바퀴 도는 환(環)형의 길이다.

현재 개통구간은 70여 킬로미터로써 시작과 끝이 있는 길이지만 모든 길이 이어지고 나면 시작도 끝도 없는 길이 된다. 전남, 전북, 경남 어느 도에서든 구례, 남원, 하동, 산청, 함양 어느 마을에서든 도보여행을 시작하고 끝낼 수 있다. 하루 7시간씩 걸을 경우 32.5일이 걸릴 것이라 한다. 그러나 전 구간을 다 돌았다 해도 길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한 달이 지나 출발 지점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다른 길이 되어 있을 테니. 같은 지점이되 꽃이 지고 꽃이 피고, 전혀 낯 선 풍경 앞에 서 있게 될 여행자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길’을 만나게 될 것이다. 같은 것은 3개 도, 5개 시군의 이름 뿐. 숲길, 고갯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은 다른 시간의 옷을 갈아입고 나그네를 맞이할 것이다.

초여름 지리산길을 걸었다. 배낭 속에는 손때 묻은 책이 들어 있었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 이 책은 걷기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한 노래집이며, 걷기에 대한 ‘시적인 정의’들로 가득한 사전이다.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세상의 모든 길은 땅바닥에 새겨진 기억이며 오랜 세월을 두고 그 장소들을 드나들었던 무수한 보행자들이 땅 위에 남긴 잎맥 같은 것

걷기는 시선을 그 본래의 조건에서 해방시켜 공간 속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 속으로 난 길을 찾아가게 한다

길을 따라가는 동안 조우하는 온갖 우연한 만남들의 기회는 우리를 근원적인 철학으로 초대한다

길을 걷다보면 세계가 거침없이 그 속살을 열어보이고 황홀한 빛 속에서 그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들을 만나기도 한다

-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에서 발췌

책을 가져가긴 했는데 읽을 필요가 없었다. 지리산길은 그 자체로 걷기 예찬으로 가득한 ‘책’이자 자연과 마을, 문화와 역사를 잇는 ‘도서관’이었기 때문이다. 길 위에서 만나는 풍경, 소리, 냄새, 촉감이 끊임없이 말을 걸었고, 마을과 당나무와 숲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때론 땀이 흐르고 때론 비바람을 맞았지만 무지개가 뜨자, 나는 이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등고재를 넘기 전 무인 판매소에서 마신 동동주가 참 맛있었다. 혹자는 지리산이라 부르는 까닭을 지혜 지(智), 다를 이(異), 뫼 산(山), 지리산의 길을 걷고 나면 지혜가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브르통이 ‘인간을 바꾼다는 영원한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길의 연금술이 인간을 삶의 길 위에 세워놓는다’ 고 말했던 것처럼.

한편, 지리산길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끊어질 위기에 놓여 있다. 현 정부는 2007년 20억이었던 지리산길 사업예산을 2009년엔 10억으로 대폭 삭감했고, 사업주체도 사단법인 숲길에서 지자체로 이관했으며, 사단법인 숲길 앞으로 책정된 2억은 집행하지도 않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지리산길의 목을 조르는 이유는 이 길이 노무현 참여정부의 흔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일까. 그래서 이젠 길도 죽이려는가.

http://myjirisan.org/bbs/write.php?bo_table=member_join

죽이려는 자가 있으면 살리려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세계적인 트레일 코스가 될 지리산길이 이대로 죽어간다면너무 안타깝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