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_썸플레이스

썸플레이스 7 - 침묵의 쓸모

삐노 2009. 6. 16. 17:06

세상에서 '침묵'이란 단어가 가장 많이 들어간 책은 무엇일까? 내 짐작엔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일 것이다. 책 제목 탓에 펼치면 백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백지 대신 '침묵'을 주어로 한 문장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문장들 하나, 하나가 시가 되어 날아간다. 피카르트는 말한다. '인간은 자신이 나왔던 침묵의 세계와 자신이 돌아갈 또 하나의 침묵의 세계 - 죽음의 세계 - 사이에서 살고‘ 있으며 '시는 인간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 침묵에서 다른 침묵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침묵의 세계>를 읽다보면 그가 쓴 문장이 시가 되어 이를 증명하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지상에 아직 침묵이 존재하고 있음을 가장 근래 느끼게 해준 장소는 검룡소였다. 굳이 피카르트가 얘기해주지 않더라도 도시란 이미 소음으로 가득찬 공간이 아니던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거대한 소음 발전소, 서울에서 한강을 거슬러 태백의 검룡소로 갔다. 6년 전과 달리 오가는 길도 포장이 되어 있고, 주차장도 널찍하니 정비되어 있었다. 차를 세우고 길을 나섰다. 단체여행을 온 고등학생들이 떠들썩한 웃음을 터트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항상 교실 뒷자리에서 앉아있을 듯한 아이들이 느닷없는 비명을 지르며 지나갔다. 그리고 갑자기 숲은 정적으로 휩싸였다.

자연의 사물들은 침묵으로 가득 차 있다. 침묵을 담는 그릇처럼, 침묵으로 가득 찬 채, 자연의 사물들은 거기 존재하는 것이다 (......) 산, 호수, 들판, 하늘은 인간의 도시에 있는 소음의 사물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침묵을 다 비워내 주려고 어떤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중

시간조차 멎어버린 것 같은 숲, 한가운데로 오솔길이 이어졌고 검은 나비, 흰나비가 날아올랐다. 침묵의 전령인 듯 수백 마리 나비들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의 발걸음이 다가오면 천천히 날아올라 길을 안내했다. 쉴 새 없이 나비들이 날아오르는데 소리가 없어, 무성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나비가 이렇게 많은 길은 처음인데?” “정말 신기하군.” 동행했던 M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눌 땐 침묵이 곁으로 다가와 귀를 기울였다. 개울을 건너자 푸른빛의 터널이 이어지고 한강의 발원지에 도착했다. 도시에서 추방당한 침묵이 웅크리고 있다가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에서 솟아올라 지상에 고이는 물 위로 뛰어내렸다. 하루 사이 수천 톤이 솟아오르는 물은 침묵을 머금은 뒤 푸른 이끼 사이를 지나 아래로 흘러갔다. 이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또 다른 물줄기들을 만나며 서울의 한 가운데를 관통한 뒤 바다로 갈 것이다.

한강의 첫 걸음의 시작되는 곳, 검룡소에서 프로포즈를 한다면 - 우리 사랑 여기서 발원되다

피카르트는 침묵이 현대세계에서 추방당한 까닭을 ‘수익성’이 없고, ‘목적성’이 없고, ‘생산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장자가 외물 편에서 말한 '쓸모없음의 쓸모있음'을 되새겨 본다면 우리들이 아직 침묵으로부터 배우고, 얻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피카르트의 책을 읽은 신경숙 소설가는 말했다. ‘실리와 유용의 저편에 있는 침묵이 사실은 가장 먼데까지 퍼져나간 가장 성숙한 존재의 대지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