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쳐뉴스_대륙횡단여행

[4] 비밀의 서랍 속, 단 한 사람만이 가지는 보석

삐노 2006. 7. 28. 14:02


지금이면 여행객들이 하나, 둘 떠나거나일찌감치떠난 여행객들은 하나, 둘 돌아올 즈음이 되었다. 물론 그들이 패키지 여행으로 안전하고 편안하게 돌아올지, 미지의 여행길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을 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장담할 수 있다. 패키지 여행은 당신이 가진 사진첩 속의 페이지는 늘려줄 수는 있어도, 당신의 재산이 되지는 못한다고. 당신을 보호하는 것은 코스와 일정과 시스템일 뿐, 그곳에 신은 없다고. 미지의 여행에서는 언제나 여행자를 보호하는 여행의 신이 어깨에 내려앉으며, 그 신은 고난의 길을 선택한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게 된다고, 그리고 그것은 수십 억 인류 중에 단 한 사람만이 가지는 보석이 된다는 것을.

이란과 파키스탄 사이의 국경을 지나 파키스탄의 국경 도시, 그러니까 기차역이 있는 첫 국경 도시에 도착한 것은 이란 국경을 출발한지 40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물론 실질적인 거리상으로는 열 시간이 채 안 되었으리라만 도중에 타이어가 터져버리는 바람에 사막에서 하룻밤의 노숙을 하며 하루 밤낮을 보낸 탓이었다. 게다가 고쳐온 타이어가 불안한지 버스 운전사는 더 이상 속력을 내지 못하고 느릿 느릿 국경의 도로를 달렸다. 나는 이란 국경에서 만난 폴란드 친구, 폴과 마을에 버스가 도착하자 마자 기차 역으로 향했다.

사막의 먼지로 뒤덮힌 채 가로등만이 불 밝히고 있는 폐허 같은 도시. 사막의 먼지인지 밤 안개인지 알 수 없는 뿌연 입자들로 휩싸인, 영국 식민지 시대의 역사. 플랫폼에 세워져 있는 브라운관에서는 지구 저 편의 위성 방송이 흘러나오고, 그 아래 쪼그려 앉아 화면을 주시하는 맨발의 사람들. 그건 마치 핵 전쟁 이후의 도시를 연상시켰다.

폴은 핵전쟁 이후의 도시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나는 고국에서 있을 여동생의 결혼식 날짜에 맞추기 위해서 서둘러 매표소로 향했다. 그러나 기차 시간표를 들여다 보자 마지막 기차는 이미 떠난 후 였다. 폴과 나는 하루종일 거의 아무 것도 먹지 못한 탓에 요기를 할 곳부터 찾았다. 그러나, 핵전쟁 후의 상점들은 이미 문을 닫은 후였고, 배 속에서는 국적을 불문하고 꼬르륵 소리가 계속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때, 광장 저편에 손수레에 솥 단지를 놓고 무언가를 파는 사내가 보였다.

- 어이, R! 신이 우리를 돕는군. 저기 노점상이 있어. 저기서 뭔가 먹을 만한 것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국의 포장마차와 같은 작은 손수레에 두 개의 솥 단지를 놓고 카레라이스를 파는 사내였다. 마침 철수를 하려던 그가 마지막 손님을 맞이했다. 우리는 카레라이스를 시켰다. 사실 메뉴라곤 카레 라이스 밖에 없었다. 그는 먼저 조그만 플라스틱 밥 그릇에 폴폴 날리는 쌀 밥을 한 주걱씩 올려놓고, 솥 단지를 열어 카레를 한 국자씩 부었다.

카레는 인스턴트 카레 파우더를 넣어서 만들어진 게 아닌, 향을 내는 나무 껍질들을 통째로 넣어서 끓인 오리지날 카레였다. 가끔씩 입 안에서 씹히는 나무 껍질을 뱉어내야 하긴 했지만, 근 이틀동안 거의 제대로 먹지 못했던 폴과 내가 그 카레라이스를 얼마나 맛있게 먹었을런지는 상상이 가리라. 폴과 나는 카레라이스를 먹으며 정말 많이 행복해 했다.

- 정말 맛있군, 안 그래, R?

- 응, 정말! 내가 지금껏 먹은 음식 중 최고로 맛있는 음식이야.

그때였다. 세 마리의 바퀴벌레가 솥 단지 안에서 쪼르르 빠져 나와 솥 단지의 외벽을 타고 아래쪽으로 사라진 것은. 그리고 우리는 순간 동작을 멈추고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폴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 R, 너도 봤어?

나의 눈빛이 대답했다.

- 응, 나도 봤어.

그때 이미 폴은 카레라이스를 한 숟갈 정도를 남겨둔 참이었고, 나는 아직 3분의 1이 남아 있었다. 그는 숟가락을 놓았고, 입 안에 있던 음식을 바닥에 뱉었다. 내 입 안에는 막 한 숟갈을 집어 넣어 씹다 만 카레라이스가 들어 있었다. 모르겠다. 왜 그 순간에 원효가 떠올랐는지.

의상과 함께 천축국으로 가던 원효. 한밤의 어둠 속에서 너무나 달게 마셨던 물이 아침이 되어 보니 해골 속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깨달음을 얻어 홀로 되돌아왔던 원효. 1300여년 전, 하루 밤 사이에 일어났던 일이 마치 내가 겪었던 일인 양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천천히 입 안의 음식을 씹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그리고 나는 남은 카레라이스를 다 먹어 치웠다. 음식값을 치르고 뒤돌아서는 나에게 폴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물었다. 바퀴벌레가 들어 있던 음식인데, 그걸 보고서도 왜 너는 그 밥을 다 먹었냐고, 게다가 이런 후진국에서 음식을 잘 못 먹어 탈이 나면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른다고. 한낱 일상 영어 회화 수준의 내가 원효의 이야기를 어떻게 영어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아니, 그것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저 빙그레 웃어주었다.

이 늦은 시각에 어디서 숙박지를 구하나,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역사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내일 아침, 가장 이른 이슬라마바다행 기차를 타자는 결론에 도달한 우리는 다시 기차역으로 들어갔다. 그때 덜컹 덜컹 소리를 내며 느릿 느릿 기차가 출발하고 있었다.


고개를 내민 승객에게 어디로 가는 기차냐고 물었다. 이슬라마바다~ 연착으로 막차가 이제 출발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아직 파키스탄 루피로 환전을 하지 못했던 탓에 우리에겐 단 한 푼의 루피도 없었다. 폴과 나는 티켓을 사지도 않은 채, 무작정 기차에 올라탔다. 케세라 세라! 그 뜻이 될 대로 되라든, 다 되겠지든.

기차 안에는 승객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두 사람씩 앉는 좌석에 세 사람 네 사람이 끼어 앉아 있었고, 심지어 짐을 올려두는 선반에도 사람들이 올라가 잠을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명절날 귀성 열차 안의 승객보다 두 배는 더 많은 듯 했다. 중학교 때 읽었던 박범신의 글. 그의 아버지가 들려주었다던가. 명절날 귀성객들로 가득 찬 기차라도 첫 칸에서 끝 칸까지 돌아다녀보면 반드시 한 자리는 비어 있다고, 아무리 힘든 세상이라도 네 한 몸 먹여줄 자리는 있다고.

과연 그 이야기가 선반에까지 사람이 누운 이 파키스탄의 오지에서도 적용될지 알 수는 없었지만 기차가 역을 떠나고 나서도 나는 폴을 이끌고 다음 칸으로, 다음 칸으로 옮겨 갔다.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을 비집고 얼마나 많은 열차 칸을 지나갔을까? 붉은 글씨의 파키스탄어로 뭐라고 적혀 있는 열차의 문을 열었을 때, 열차 안에는 좌석도 없고, 선반도 없고, 텅 빈 공간에는 그저 몇 개 마대 자루와 희끗 희끗한 머리의 노인이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 여기가 끝입니까?

- 무슨 일이요?

- 방금 도착했기 때문에 미처 티켓을 사지 못했어요. 지금이라도 티켓을 살 수 있으면 살께요. (호주머니 속에 약간의 달러가 있었다. ) 라호르까지만 해도 10시간은 넘게 걸릴 텐데, 빈 자리가 없는지 찾고 있었어요.

- 어디서 왔소?

- 저는 한국인이고, 그리고 이 친구는 폴란드인입니다.

- ……짐을 내려놓고 앉으시오. 여기가 오늘 당신들을 위한 빈 자리요.

기차의 마지막 칸은 우편 열차였다, 편지와 소포들이 실려 있는. 머리칼과 콧수염이 희끗희끗한 그는 우리에게 편한 대로 바닥에 앉으라고 권했다. 자고 싶으면 누워도 괜찮다며. 그리고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바깥 풍경을 쳐다볼 뿐. 뜻하지 않은 행운에 폴과 나는 바퀴벌레를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눈빛으로 아무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폴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 R, 어쩜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나의 눈빛이 대답했다.

- 여행의 신이 우리들의 어깨 위에 앉아 있어.

만약 우리가 빼곡하게 들어찬 사람들의 틈 바구니에서 엉덩이라도 붙일 자리를 찾아 그 자리에 그냥 주저 앉아 버렸더라면 지금쯤 어떤 자세를 하고 있었을까? 그도 나도 말 없이, 말 없는 노인의 눈치를 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열차는 달렸고, 1시간쯤 지나 다음 역에 도착하자 또 다른 한 사내가 들어섰다.

두 사내가 몇 마디를 나눈 후, 새로 들어온 그가 우리에게 다가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직업이 뭔지, 또 다른 어떤 나라들을 가보았는지, 이런 저런 것들을 물었다. 나이는 앞 전의 노인과 비슷해 보였지만 약간의 장난기와 호기심이 가득한 인상이었다. 그가 오른쪽 상의의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다가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폴에게 물었다.

- 한 대 줄까?

- 괜찮아요, 저도 있어요.

- 이건 마리화나야.

- 네? 마리화나요? 파키스탄에서는 마리화나가 합법인가요?

- 아니, 금지되어 있지. 그러나, 나는 피워도 돼.

- 왜요?

- 내가 경찰이니까

- !!!!!


그는 마리화나에 불을 붙인 후 열차의 문을 열어 제쳤다. [세상 밖으로]같은 영화에서 보았겠지만, 구식 열차의 화물 칸은 벽 자체가 곧 문이다. 옆으로 드르륵 밀자 한 쪽 벽면 전체가 창이 되었다. 기차는 가까운 풍경조차도 충분히 감상할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달리고 있었고, 폴과 나는 기차 바깥으로 다리를 내어 걸터 앉은 채 그가 건네 준 마리화나에 불을 붙였다. 남국의 따뜻한 밤, 마치 고갱이 그려놓은 원시적인 유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검은 무소의 등과 뿔들이 어둠 속에서 번들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논에 댄 물 위로 보름달이 사뿐 사뿐 내려앉았다.마리화나 때문인지, 지나간 달은 발자국을 남기듯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고, 새로운 달이 하나, 둘, 셋, 넷… 계속 계속 늘어만 갔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수천 수백개의 달이 물 위를 둥둥 흘러가고,

찰칵! 60억 중에 단 한 사람만이 가지는 보석이 내 비밀의 서랍 속에 담기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