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쳐뉴스_대륙횡단여행

[2] 다시 쓰는, 해 뜨는 아침의 나라로 - 반야에 대한 기억

삐노 2006. 7. 8. 02:24

여름이 왔다. 방학과 휴가의 계절. <전방 휴게소 700m>. 7월이란, 고속도로 위의 삶에서 맞이하는 휴게소의 전방 간판 같은 것, 당신이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나 지방도로로 벗어나지 않는 한, 목적지까지 가는 내내 일 년에 한 두 번 쉬어 가게 되는 .

<전방 휴게소 700m>란 간판을 발견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 R, 나야.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 응, 어인 일이래? 이런 시간에.

- 이번 여름 휴가로 해외 여행을 좀 다녀오려고 계획을 하고 있던 중인데 네 조언을 좀 들을까 해서……좀 저렴하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가 휴가철에 유럽을 갈 생각이라면 패키지 여행만큼 싼 상품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패키지 여행을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패키지가 아닌 여행을 하는 것 또한 두렵다고 말했다. 여행 비용을 최소한으로 아끼면서, 낯선 곳에서 스스로 숙박지를 찾아가야 하고, 스스로 교통수단을 선택해야 한다. 딜레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안전하고 검증된 코스를 찾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모험과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코스는 없을까, 두리번 거린다. 나는 그런 코스는 없다고 대답한다.

모험과 스릴이란 미지의 길에서만 가능하므로, 코스라는 것이 존재하는 순간 그 속엔 이미 모험과 스릴의 정수는 빠져버리는 것이라고. 따라서 그들이 나에게서 제대로 된 답변을 듣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고작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의 한 마디를 듣게 될 것이다. "일단 네가 가고 싶은 나라로 떠나, 그 뒤엔 나도 몰라." 그렇게 한때 나는 제대로 된 여행 가이드북 조차 없이 지구 반 바퀴를 돌았고, 그런 탓에 구체적인 숙박지와 코스 같은 것이 머리 속에 남아 있을 리도 없었다. 그대신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눈을 감기만 하면 바로 그 장소, 그 풍경 속에 들어가 있을 수 있다.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하여, 당신에게 한두 달 정도의 방학이 혹은 휴가가 주어진다면, 그리스로 가는 가장 값 싼, 편도 티켓을 사라고 이야기 하겠다. 오래 전 서구 문명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에서 출발하여 아크로폴리스를 지나, 터키의 모스크, 중동의 사막, 정치와 종교의 혼돈으로 아수라장인 파키스탄, 세계의 지붕인 히말라야를 거쳐 중국이라는 대륙, 그리고 인천항으로 귀국하는 길은 상당히 의미가 있는 여정이 될 테고, 두 달이면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가능한 기간이다. 그 길을 따라 당신은 문명의 흐름에 대한 생각이라든가, 헬레니즘과 불교가 만나는 간다라 미술의 흔적을 보게 된다든가, 스스로 해바라기가 되어 동쪽으로, 동쪽으로 <해 뜨는 아침의 나라>로 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유럽 몇 개국 배낭여행 몇 박 몇 일, 정도의 비용이면 그리스에서 한국까지 육로와 수로를 이용해서 충분히 돌아올 수 있다.

물론 안전은 보장하지 못한다. 카라코롬 하이웨이에서 당신은 트럭을 얻어 타고 가다가, 수백미터 절벽에서 떨어져 내려오던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고, 어느 지점에서 마리화나에 취해 영원한 잠 속으로 빠져들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위험만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니니, 여기 나의 지난 길 위의 기억 몇 조각을 <여름 특집>으로 내어 놓는다, 여행 경비를 아끼기 위해서 이동 수단을 잠자리로 이용하던 탓에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다른 도시였던. 그래, 눈 뜨면 다른 도시여라.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이탈리아의 브린디시에서 그리스의 항구로 가는 배 위에서였다.

지중해를 건너는 야간 유람선을 이용하기 위한 절차를 밟는 동안 배 시간이 촉박했고, 수속이 끝나고, 시계를 보자 2분이 남아 있었다. 부두까지는 4~500m 거리였다. 배낭을 어깨에 단단히 메고, 나는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배를 놓치면, 이 항구에서 하루 밤의 숙박비를 치뤄야 한다. 선착장에 도착하는 순간, 배는 막 뱃고동을 울리며 출발하려는 시점이었고,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나의 모습을 본 선장은 잠시 배를 멈춰 주었다. 그렇게 나는 가까스로 배에 올라탔다.

계단을 타고 유람선의 이물에 올라선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환희의 소리를 질렀다. 야호~ (디카프리오와 누가 누가 목소리가 더 큰지 내기를 했다면 이기고도 남을 환호성이었다), 속으로 마치 타이타닉의 한 장면 같군, 하고 혼자말을 하면서.

야외 수영장과 나이트 클럽, 바 시설까지 갖춘 유람선 내에는 나를 제외하곤 수많은 승객 들 중 동양인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평원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고, 스페인에서 온 여자 아이들이 고물에서 알아듣지 못할 이별 노래를 합창하고 있었다. 급히 오느라고 담배 사는 걸 잊었구나, 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등 뒤에서 부시시 침낭을 걷으며, 벤치에서 일어나는 당신을 만났다. 눈빛이 서늘한 동양 여자였다.

- Excuse me, do you smoke? 실례지만, 담배 피세요?

- yes 네.

- Could you give me a cigarlette? 한 개피 주실 수 있을까요?

- Of course, here!...where are you from? 물론, 여기. 어느 나라에서 왔죠?

- I am from Korea, and you? 난 한국에서 왔어요. 당신은?

- 하하하, 여기서 한국인을 다 만나네요, 동양인이라곤 나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 하하하, 그러게 말이예요.

- 유람선에서 만난 남녀라니 꼭 타이타닉의 한 장면 같군요.

- 좀 전에 정말 그럴 일이 있었는데, 하하하 가까스로 배에 올라타는 디카프리오와 배에서 만난 낯 선 여자라.

- 하하하, 나는 케이트 윈슬렛이 아니네요!

밤바람은 따스했고, 그대가 건네 준 담배와 캔 맥주는 맛있었다. 1박 2일에 이르는 항해동안 나른한 지중해의 햇살과 평화로운 그리스의 섬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옆으로 지나가는 하얀 섬들을 보며 율리시즈의 귀향을 떠올리거나, 낮잠 속에서 크레타 섬의 미로를 헤매거나, 갑판 위에 드러누운 채 그대가 가지고 있던 함성호의 <허무의 기록>을 읽었다. .

유람선에서의 이틀을 보내며 우리는 말동무가 되었고, 그리스 항구에서 내린 후론 길동무가 되어 아테네의 신전과 터키의 사원들, 그리고 카파도키아 지역을 여행했다.

낯 선 풍경의 도시에서 당신과 한 침대에서 자던 밤들. 낯 선 곳에서 처음 만난 사내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나의 무엇을 믿고 그렇게 나와 동침을 하며 편히 잠들 수 있었을까? 화산재와 퇴적된 용암층으로 이루어진 카파도키아의 동굴 펜션. 촛불이 켜진 트윈 침대에 누워 그대에게 물었을 때, 당신은 내 눈빛을 보고 믿을 수 있었노, 라고 그 서늘한 눈으로 내 눈동자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때 내 눈빛은 당신처럼 맑았었던 걸까?

함께 방을 구하고, 일정을 정하고, 여행지를 돌아다니고, 사진을 찍고.....그렇게 열흘이 지나가는 동안, 나는 당신이 떠나기 며칠 전부터 독감을 앓았고, 당신이 간호를 해주지 않았다면 더 이상 나아가지도 못하고, 이스탄불의 게스트하우스에서 한동안을 눌러앉게 되었을 것이다. 터키에서 서울행 비행기를 예약하고 짐을 꾸리던 당신이 말했다.

- 같이 돌아가지 않을래? R은 로마에서 집시들에게 소매치기까지 당했으니, 그 돈으론 육로로 한국까지 가기엔 무리일 텐데……그리스랑 터키가 항공 티켓이 제일 싸.

- 음, 나도 그 생각은 했어, 지금 가진 돈이면 한국행 비행기 표를 사면 딱 맞긴 해....근데 포기하고 싶지 않아. 두 번 다시 이런 기회는 오지 않을 거야. 그리고 어차피 모험을 찾아서 떠난 길인걸. 계획했던 대로 대륙을 횡단해서 귀국할거야. 잘못 되어 봐야 국제 부랑자밖에 더 되겠어. 살 사람은 절대 쉽게 죽지 않아.

- 그래.....그래도 앞으론 침낭이 필요하겠지. 머지 않아 가을이니. 난 이제 침낭이 필요 없어...R에게 더 필요할 거야. 가지지 않을래?

- 그래? 좋아! 귀국하면 돌려 줄께. 나중에 J시로 내려가면 참한 후배랑 소개팅이나 시켜줘. 나보다 세네 살 어리면 좋겠다.

- 근데 꼭 너보다 어려야 돼? 한 살 많은 여자는 안 될까?

- ……

그래, 당신은 나보다 한 살이 많은, 대학을 갓 졸업한 약사였다, 지혜롭고 맑은 눈동자를 가진, 황당한 일을 겪을 때면 독특한 웃음 소리를 터트리던. 나는 당신의 평소 목소리에서는 상상 할 수 없었던 톤의 그 웃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당신 속에 두 여자가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당신이 이스탄불 공항으로 떠난 후, 나는 짐을 정리하고, 기차를 타고, 또 다른 도시로 떠났다.


기차가 터키의 사막을 지나는 동안 보름달이 떴고, 추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고향에도 저 달이 떠 있겠지. 찬 기운이 창 틈으로 새어 들어 왔다. 당신이 건네주고 간 침낭을 꺼내 잠이 들었던 첫날 밤, 나는 꿈 속에서 당신을 만났다. 그 꿈은 기묘했지만, 눈을 뜨자 내용이 전혀 기억 나지 않았다. 다만 내 입에서 “……반야!.라는 낯 선 단어가 뱉어져 나왔다. 단 한번도 떠올려 본적이 없었던 단어였기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고, 그 기억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두 달 가량의 시간이 지나 귀국을 한 후 나는 반야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반야(般若←Praj 범)[명사] 만물의 본질을 이해하고 불법(佛法)의 참다운 이치를 깨닫는 지혜. 반야는 지혜 또는 밝음의 뜻이 있습니다. 모든 사물의 도리를 밝게 보며 근원적 진리를 막힘없이 드러내는 큰 지혜입니다. 반야에 의하여 중생의 미혹과 고난과 분별 세계가 본래 없는 것을 알게 되니 반야 지혜를 공(空)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반야는 범부를 단번에 여래법성 으로 바꾸는 신령한 약이며 일체 중생을 고난에서 건져주는 해탈의 배입니다. 일체 제불도 반야에 의하여 성불하시고 부처님의 온갖 법문도 반야에 의하여 열리게 되므로 반야를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귀국 후 그녀를 찾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찾지 않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갔고, 이제는 그녀의 이름이 지연이었는지, 지현이었는지, 지은이였는지 기억 조차 나지 않았다. 그대신 ‘반야’라는 꿈 속의 이름만이 뚜렷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