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쳐뉴스_대륙횡단여행

[1] 인류의 이상, 걸인과의 만찬

삐노 2004. 8. 12. 20:02


어제 내린 비로 가방은 축축해져 속에 들어있던 이 공책 역시 축축하다. 축축해진 공책에 축축한 사연을 적지 않으리라 마음 먹는다. 그러나, 나는 안다. 축축하기 보다는 목 메였던 계단에 대해서 적고 말리라는 것을.


부다페스트에서 크로아티아로 항해 가던 길에중앙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발라톤 호수를 지나가게 되었고, 주변 풍경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에 취해 나는 그만 충동적으로 발을 내려놓고 말았다.(Inter-Rail Pass 는 지정지역내에서 무제한적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우리들의 칙칙한 선입견을 한꺼번에 씻어버리듯,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호수와 아름다운 건물들.새파란 호수의 크기는 또 바다같았으니.

역에서 가까운 숙소를 정하고 (나는 헝가리어를 못하기에 그들과 내내 손짓과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해야했다. 잠자는 몸짓, 밥 먹는 몸짓,세수하는 몸짓.....) 식사를 하고 나서, 식당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동안 TV에서는[불멸의 연인]이 방영되고 있었다.베토벤의 삶(고통에서 환희로!). 어린 베토벤이밤 길을 달려가 눕는,호수가의 얕은물이 어느새 우주로 변하는 장면은 다시 봐도 맘에 들었다. 내가 묵을 방에는 몇 점의 유화가 걸려 있었고 추적 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나그네의 잠을 이리저리 뒤척이게 했었다.

크로아티아행 기차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비는 개어 있었지만 숙소는 모두 잠들어 고요했다. 마당으로 나서자 셰퍼트가 다가왔다. 녀석은 짖지 않았고 내가 혀를 차며 스다듬어주자 꼬리를 흔들기었다. 비에 젖은 마을은 여전히 그림처럼 아름다웠고, 나는 역으로 향했다. 대합실에서 기차 타임 테이블을 읽을려고 했지만 해독 불가능한 문자들이었다.지난 밤충동적으로 내려 숙박과 저녁 식사를 하고 나니 호주머니엔 한 푼의 돈도 남지 않았고,간이역엔현금인출기가 보이지 않았다. 식사도 그른 채하행선 기차가 서기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부다페스트를 떠나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들른 장소는 헝가리 국립박물관이었다.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비하면 홀리데이 시즌이 지난 탓이었을까, 관람객이 뜸했고 그 덕에 나는 조용히 천년 전의 역사 속으로 잠길 수 있었다. (박물관에 도착하면 새로운 유물을 찾아 이리 저리 옮겨다니기 보다는 하나의 유물, 처음 대면하는 유물에 집중하고 그 시대의 소리가 환청으로 들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때 소리를 따라 한 걸음씩 역사를 거슬러 올라오는 것. 그것이나의 박물관 관람법이다.) 헝가리 왕조의 유물들이 소곤 대고 중세의 갑옷 전신상이 씩씩대는 복도를 지나 20세기의 방에 다다랐을 때, 나는 확성기에 둘러싸인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인터내셔널 꼬뮤니즘의 선전 포스터와 뱃지, 광장과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소리치는 활동사진, 콧수염의 히틀러와 2차 대전 무렵 사용되던 군용 오토바이 사이드카에 새겨져 있는 BMW 마크. 레닌의 모습이그려진 도자기, 스탈린의 흉상, 각종 선전 포스터, 내가 그 방을 빠져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대면해야 했던 유물은 스탈린과 모택동, 레닌이 쳐박혀 있는 쓰레기통과 한때 Marx 광장과 Engels 거리에 있던 표지판, 그 이름 위로 사선이 그으져 있는 표지판이었다.


건물을 빠져 나온 뒤 정오의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는 나도 모르는 무언가에 목이 메어져 왔고, 참느라고 눈이 뜨거워졌으며, 결국 터진 눈물이 계단에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나는 지난 한 세기를달려온 인류의 이상과,고통과, 환희와, 전율과, 노동과, 전쟁과, 사랑이 깃털이 되어 날아올라었던, 이카루스의 추락을 보았던 것이다. 글쎄, 그 순간의 내 심정을, 내 눈물을 당신이 이해할 수 있을런지?......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공산주의나 자본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를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이상이라는 것이 존재하던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그 계단에 서 있다가 젖은 눈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삶이 그러하듯, 역사에서도실패도 성공도없다. 우리는 또 그래왔듯이 달려갈 것이며, 저기 갓난 애, 꺄르륵 거리는 21세기가 활짝 웃고 있다고.

벤치에서의 생각을 멈추고결국 매표원으로부터 손짓, 발짓으로 크로아티아행기차시간을 알아낸 나는 시간이아직남아있었기에 막 도착하는 상행선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리로 했다.비록 아침부터 배를 곯고 있었던 탓에움직일 기력도 없었지만위치를 옮겨 또 다른 장소에서 발라톤 호수를 바라보고 싶었다. 한 정거장을 올라가 다시 가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맥주 한잔에 그 맛없다는 영국식 아침 식사만 있다면 정말 기분이 최고일거 같은데...그때 갑자기 한 사내가 곁에 앉더니 팔을 당겼다. 오십세 가량, 지저분하고 찟겨진옷, 부러진 이들 사이로 보이는 싯누런 이빨들.....정신이상의 부랑자였다.

그가 내 팔을 당기며 횡설 수설떠들어 댔지만 나는 헝가리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니 헝가리어를 안다고 하더라도 이빨 사이로 새어나오는 그의 말은 알아 듣기 쉽지 않을 듯 했다. 그의 몸짓은 따라오라는 것과 먹는 시늉. 그리고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던 한 단어는 피자! 그의 뒤편에 바로 피자집과 파라솔이 줄지어 있었고 나는 그제야 그의 몸짓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에게 피자를 사달라는 것.나는 정말 단 한푼의 현금도 없었고, 몇 Forint 라도 있다면 나부터 피자 한 조각이라도 먹고 싶을 정도로 뱃 속에서 줄곧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이어지는 판이었다.나는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손바닥을 펴 보이는 전 세계 공통어로 대답을 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죽 히죽 웃으며어깨동무까지 하더니 나를 가게 앞으로 무작정 끌었다. 화가 슬슬 나기 시작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팔을 홱 뿌리치며 눈을 부라렸다. 그제서야 그는 주춤 주춤 물러섰다.

화를 가라앉히며 다시호수가에 앉아 담배를 물려니이번에는 다른아주머니가 다가온다. 오십을 좀 넘으셨을까? 히끗 희끗한 머리의아주머니내 앞에서 뭐라고 한참을 떠들어 대는 데 이히, 디히.....이번엔 독일어다. 그리고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던다른단어는 또 피자!이 아주머니는 독일어로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주위는 다른 호수가보다 잔디 정리가 잘 되어 있고 내 등 뒤로는 피자집과 파라솔이 널려 있다. 내가 주저 앉아 담배 피우려던이 장소는 피자집의 사유지이고 피자를 먹지 않는다면 식당의 마당에서 나가달라는 것.....아마 그런 뜻인가 보다.나는 베낭을 어깨에 짊어지며 장소를 옮길려고일어 섰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 내 손을 끌어서는기어이 파라솔에 앉히고 만다. 난감하기 이를데가 없다.그리곤 이 아주머니 피자를 한 판 받아와서 막무가내로 내 앞에 내려놓는다. 지불할 돈도 없는데 이걸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떻게 해야 거절할 수 있지. 근데 이건 또 뭔가? 그녀가 맞은 편에 앉아 피자 한 조각을 뜯어선 먹는다. 도대체 이 무슨 해괴한 짓이란 말인가?

그녀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의 케시 베이츠처럼웃으며 내게 그녀의 기차표를 꺼내어 보여 주었다. 기차표에 씌여진 시간은 PM 6: 00.그녀는 기차 시간이 촉박해 있는데 혼자 피자 한 판을 다 먹지 못하기에 나와 나눠 먹자고 했던 것이다.나는"당케!"라고 고마움을 표시했다.그녀는함박 웃음을지으며 피자 두 조각을 맛나게 먹은 뒤, 자신의 손목 시계 PM 5: 50을 톡톡 두드린 뒤일어섰다. 아우프 비더제엔! 그녀가 작은 가방을 들고 간이역으로 향하는 모습을 손을 흔드는데.....이건 또 뭔 일인가?



내가 하루 내내 가장 먹고 싶었던 맥주와달걀 프라이, 쏘세지, 햄, 구운 토마토가 담긴 접시가내 앞에 텅 하고 놓이는데어? 좀 전의 그 부랑자가 히죽 웃으며 맡은 편에 앉는다. 하나는니 꺼, 하나는내 꺼라는 손짓을하며. 그리곤 음식 받침대에 올려져 있던 영수증과동전을자신의 호주머니에 집어 넣으며 나 보고 어서 먹으라는 몸짓을 한다. 나는 어리벙벙해졌다. 내가 정신이상의 부랑자가 구걸을 하는것이라고 짐작하며 뿌리쳤던 그가 같이 식사를 하자고내 어깨에 동무를 했던것이었다니. 그러나,그가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내가 하루 종일 맥주 한 잔과이 요리가가장 먹고 싶었다는 것을.


그 황금빛의 맥주 한 잔과요리는 지상 최고의 만찬이었으며 발라톤 호수가의 파라솔 아래에서, 나는걸인의행색을 한 천사와 함께 식사를 하며 이 세상의 왕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는 이런 행운 혹은 어이 없는 호의들을어떻게 이해해야할지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그 역시 나를 보며손목을톡톡 두드리더니사라졌다. 마치 또 다른 여행자를 위한 기차 시간이 다 되었다는 듯이.


난 헛 것을 본 듯 했지만 내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한 잔의 맥주와 음식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