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쳐뉴스_대륙횡단여행

[3] 해 뜨는 아침의 나라로 - 밤 하늘을 흐르는 은빛의 거대한 강

삐노 2006. 7. 20. 21:54


반야와 헤어진 지 열흘 후 파키스탄의 국경 지대에서, 내가 탄 버스의 바퀴가 터지면서 부득이하게 사막에서 노숙을 하던 밤을 떠올린다. 한참을 기다리자, 버스가 지나간다. 사람들은 손을 흔들어 버스를 세우고, 승객들은 태우지 못하고 터진 바퀴만을 태운 채 버스는 떠난다. 사막의 지평선 너머로 해가 지기 시작하고, 터진 바퀴가 언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해가 지평선을 넘어가고, 밤이 와도 터진 바퀴는 도착하지 않는다. 버스 안은 땀 냄새와 야릇한 향수 냄새(이슬람 국가에서는 대중 교통을 이용하면 손에 향수를 발라준다.)로 가득 하다. 인샬라! 신을 벗고, 양말을 벗고, 담요를 덮고 잠든 승객들. 이슬람 전통 의상을 입은 사내 하나가 도로 가에 앉아 소변을 누고, 또 다른 사내들은 초조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나는 뜻하지 않게 사막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일에 대해서, 그리고 국경에서 벌어졌던 불미스런 행운에 대해서 떠올린다.

파키스탄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이란의 국경마을에서 먼저 내려야 했다. 그리고 짧은 거리의 중립지대를 지나 파키스탄의 국경에 도착하면, 비자와 여권을 확인한 후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가까워 봐야 9시간은 넘게 걸린다고 했다)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다고 했다. 이란의 국경마을에서 파키스탄의 국경 초소를 오가는 택시를 잡으려는데 낯 선 백인 청년이 인사를 건넸다.

- Hi, are you Japanes? 안녕, 너 일본인이냐?

- No, I am Korean! 아니, 난 한국인이야.

- 휴우, 다행이군. 일본인은 정말 싫어. 근데 여행 중에 만나는 아시안의 대부분은 일본인이더군. 넌 어디로 가? 난 파키스탄으로 가는데.

- 나도 그래.

- 그럼, 나 좀 도와줄래. 택시를 타야 하는데, 여행자 수표를 못 바꿨어. 이 근방에선 환전소를 찾을 수가 없더군. 파키스탄에서 갚아줄게

- 좋아. 문제 없어. 내 이름은 R이야!.

- 고마워, 난 폴이라고 해.

그는 정오를 갓 지나 새하얗게 표백 되어가는 사막을 지나가는 내내 일본인에 대한 욕을 해 댔다. 퍽킹 재패니즈! 내가 일본인이라고 했더라면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을 거라며. 그는 폴란드 청년이었고, 전공은 저널리즘이라고 했다. 그는 일본인들의 더치페이를 비난했으며, 길동무가 되어 단 둘이 동행을 하게 되면 친한 척, 약한 척 하다가 제 나라 패거리들을 만나면 마치 해방이라도 된 듯 날뛰며 그동안 함께 했던 길동무를 가난뱅이 폴란드인이라고 업신여기는,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하며, 홀로는 약하고, 뭉치면 거들먹거리는 그들의 습성을 혐오했다. 비자?

파키스탄 국경초소에 도착하는 순간 문제가 발생했다. 비자를 확인하고 도장을 찍던 사내가 왜 비자가 없냐며 나의 여권을 가리켰다. 비자? 비자를 확인하고 입국 스탬프를 찍는 것이 일과인 그 앞에 비자가 없는 동양인이 나타난 것이다.

- 이보세요, 파키스탄이랑 한국이랑 비자면제 협정에 의해서 비자 없이 6개월간 체류가 가능해요.

나의 말은 통하지 않았다. 국어도, 영어도. 그는 말 없이 다른 사람들의 여권에 붙어 있는 비자를 보여주며 나의 여권을 흔들었다. 잠시 후 그는 나를 초소의 대장에게 데리고 갔다. 한참 동안 파키스탄어로 보고를 하고 나자, 무거운 의자에 흔들 흔들 앉아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던 뚱뚱한 사내가 더듬 더듬 영어로 묻기 시작했다.

- 너는 파키스탄 입국 비자가 없다. 이란으로 돌아가서 비자를 받아 와야 한다.

- 이봐, 나는 파키스탄 입국 비자가 필요 없는 한국인이야. 비자면제 협정에 의해 한국인은 6개월간 당신의 나라에서 체류할 수 있다구.

- 여기 오스트레일리아인이든, 일본인이든, 폴란드인이든 모두 비자를 준비해 왔다. 너만 비자가 없어. 비자 없이 여기를 통과하는 사람은 없어. 이란으로 돌아가 비자를 받아 와라.

- 내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다면 이슬라마바다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전화를 해서 확인을 하던가, 아니면 당신 나라의 외교부에 확인을 해보라구. 내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때, 이란으로 돌아가겠어.

내가 수화기를 들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수화기를 빼앗았다.

- 장거리 전화는 돈이 많이 든다. 이란으로 돌아가서 비자를 받아와라.

- 내가 지불하겠다. 5분이면 충분하다. 얼마냐?

- 사소한 일로 장거리 전화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란으로 돌아가서 비자를 받아와라.

- 이봐, 난 비자가 필요 없는 한국인인데 내가 왜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하지? 사실 여부를 확인하든가, 확인을 못한다면 나를 그냥 보내주던가 해.

- 그렇게는 못한다. 이란으로 돌아가서 비자를 받아와라.

그가 하는 모든 문장의 끝은 이란으로 돌아가서 비자를 받아와라, 로 끝났다. 그런 식으로 한 시간이 넘게 실갱이를 하는 사이, 나를 콧수염에게 데리고 갔던 사내가 오래된 서류뭉치를 꺼내와서는 그의 보스에게 내밀었다.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며 서류의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사무실 구석의 캐비닛에 처박아둔 서류 뭉치들 사이에서 비자면제협정에 관한 공문을 찾아온 것이다. 그 공문이 씌인 해는 1985년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파키스탄에 발을 딪게 되었다. 건물을 나서는 나의 뒤통수를 향해 사내가 영어로 더듬 더듬 외쳤다. 나, 한국인, 여기서, 본 것, 처음. 국경 초소 앞에 폴이 다른 백인들과 어울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R! 어떻게 된거야? 이란으로 되돌아간 줄 알았어. 하마터면 너에게 진 빚을 못 갚을 뻔 했군. 참, 이 친구들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왔대. 같은 방향이야. 그래서 동행하기로 했는데, 너도 좋지?

- 물론, 안녕, 내 이름은 R이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젊은이들은 여섯이었고, 여자 둘에 사내 네 명이었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여행 경로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 후, 폴과 나는 함께 마을 구경을 나섰다. 폴 역시 나처럼 호기심이 많은 친구였다.

- 이봐, 버스는 한 시간 후에 도착한다고 하니, 우린 구경 좀 하고 올께.

드 넓은 사막의 땅 한가운데 빽빽하게 지어진 마을의 담과 벽과 집은 먼지색의 흙으로만 이루어져 미로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막 한 가운데, 높이 2미터의 집과 벽과 길들로만 이루어진 마을. 새파란 하늘을 이고 있는 미로를 헤매이는 사이, 버스가 출발한다는 경적이 울렸다. 너무 멀리 왔구나. 폴과 내가 좌로, 우로 길을 헤매며 다시 공터에 도착했을 때, 버스는 이미 출발하고 있었다.

- 헤이, 헤이, 기다려.

폴과 내가 다급하게 외치자 두 대의 국경버스 중 한 대가 멈춰 섰다. 부리나케 버스에 올랐는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차창을 내다보니 앞서 나가는 버스 바깥으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여자애가 손으로 말을 했다. 아마도 다음 도착지에서 보자, 기다리겠다. 그런 내용이었으리라. 그러나, 폴과 나는 그녀가 손으로 전해준 말의 정확한 의미를 영영 확인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손을 흔든 후, 그들이 탄 버스는 속력을 내면서 멀어져 갔고 그리고 운명이 갈렸다.

몇 시간 후, 폴과 내가 발견한 것은 검은 연기를 피워올리며 뒤집혀진 버스의 잔해와 사고의 파편들이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몇 명이 죽었고, 몇 명이 살아 남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동시에 출발했지만 그 버스는 너무 앞 서 갔다. (국경 도로는 지면보다 1m 가량 높이 솟아 있고, 폭이 버스 두 대가 겨우 지나칠 수 있을 정도다. 마주 달리는 버스가 조금만 폭을 더 많이 사용하면 부딪히고 만다, 그래서 마주 오는 차량이 있을 경우에는 속도를 줄이며 서로의 폭을 확인해야 한다. )두 대의 버스. 1/2의 확률. 폴과 내가 예정대로 버스를 탔더라면, 나는 지금 이 글을 적고 있지 못했을런지도 모른다.그래, 우리는 그들과 같은 버스를 타기로 되어 있었다, 적어도 미로가 우리 둘을 헤매게 하지 않았더라면. 삶과 죽음을 오간 것은 찰나였다.

버스 안의 사람들은 모두 바퀴를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었고 폴 역시 이불을 덮고 잠이 들었다. 나는 반야로부터 건네 받은 침낭을 갖고 나와 도로 아래 자리를 펴고 누웠다.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 왔었지. 사막에서의 노숙을. 그리고 보았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라고, 도시에서 사랑하고, 도시에서 잠 들던 나는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라고 노래는 불렀지만 그처럼 선명한 은하수를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그날 처음 사방이 지평선이고, 사방으로 인공의 빛이라곤 한 점도 없는 어두운 사막에서 은하수(銀河水 Milky Way)에 내 눈을 첨벙 담근 것이다. 그건 그야말로 밤 하늘을 흐르는 은빛의 거대한 강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갔던 그 날, 나는 그 흘러가는 우유빛 강을 올려다 보며 좀처럼 표현할 수 없는 야릇한 슬픔과 황홀경에 취한 채, 코 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사막의 향기와 바람을 느꼈다. 바람아, 너는 몇 번이나 이 지상을 돌아 내 코를 스쳐 지나가고 있니. 휘이익- 별똥별이 휘파람을 그으며 지나갔다. 그날 밤 나는 서른 여 개의 별똥이 지나가는 모습을 본 후에야 잠이 들었다. 별똥이 사라지기 전에 소원을 빌었던가? 빌었다. 해 뜨는 아침의 나라에 도착하게만 해달라고. 인청항에 발을 내리는 순간, 나 그 땅에 입 맞추리라고. 그리고 다음날 알게 되었다. 내가 하루 밤 사이 또 다른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었다는 것을.


- 헤이, R? R?....일어나봐!

- 히 이즈 데드!

- 헤이, R? R?

- 스네이크!

- R! R! 일어나!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왔다. 나는 침낭 속 깊숙이 잠 들어 있었다. 침낭을 들추고 일어나자 폴과 세 명의 파키스탄인이 나를 둘러싸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무슨 일이야? 폴.

- 네 주위를 둘러봐, R!

침낭에서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보자 온통 뱀 구멍 투성이였다. 가로등 하나 없는 탓에 나는 내 누울 자리가 뱀들의 터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내가 버스 바깥으로 나가 잠드는 모습을 아무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 이곳 사막의 뱀들은 독사라구...R! 넌 정말 럭키 가이야.

해가 뜨고 한참이 지나도 여전히 터진 바퀴는 돌아오지 않고, 옆에 서 있던 파키스탄 소년이 손을 들고 먼 지점을 가리킨다. 사막 저 편에 한 채의 집이 신기루처럼 아득하게 보인다. 폴과 나, 내 침낭을 둘러싸고 걱정스레 바라보았던 파키스탄 청년 둘, 그리고 소년이 함께 달리기 시작한다, 사막을 가로질러 가물 가물 사라질 것만 같은 집을 향해. 저 곳에 가면 뭔가 마실 물과 먹을 걸 구할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