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_썸플레이스

썸플레이스 4 - 카필라 성에서의 낮잠

삐노 2009. 4. 27. 02:11

내 발 아래에서 함께 잠 들었던 검은 개, 나는 녀석에게 찬타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부처가 탄생 직후 외친 말이라고 한다. ‘염화미소’는 부처와 가섭 사이에 오간 무언의 설법이라고 배웠다. ‘곽시쌍부’는 입멸 후 부처가 관 밖으로 발을 내밀어 보인 유언이다. 그렇게 국정 교과서부터 불교서적에 이르기까지 부처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을 듣고, 배우고, 읽었지만 부처의 전 생애를 알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경기도의 한 암자에서 지내는데 우연찮게 한 권의 책이 손 안으로 들어왔다. 유홍종의 <논픽션 붓다>. ‘지금까지 나와 있는 객관적인 자료들을 뽑아서 부처님의 생애를 한 눈에 읽을 수 있도록 정리’한 다큐멘터리 소설이었다. “부처님 얘기는 작가가 써야 재미있을 텐데”라는 노승의 말에 힘을 받아 씌어졌다는 <논픽션 붓다>를 읽는 동안, 내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이야기들이 한 눈에 정리가 되었다. 탄생과 출가, 위대한 깨달음, 승단 조직과 제자들, 전도여행, 달마의 진실, 귀향, 행복에 이르는 길, 대열반.

나는 부처가 탄생했다는 룸비니를 방문하기로 했다. 이젠 '논픽션'을 나 스스로 확인할 차례였다. 각국에서 온 방문객들은 아기 부처의 몸을 씻었다는 연못가를 거닐고, 아소카 탑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각국의 사찰들을 돌다가 떠나곤 했다. 부처가 출가하기 전까지 왕자로 지냈던 카필라 성은 룸비니에서 버스로 1시간 거리에 있다고 했던가? 룸비니까지 온 참에 카필라 성까지 나 홀로 가보기로 했다. 이른 아침 비스킷 몇 조각과 생수 한 통을 챙긴 뒤 길을 나섰다. 지평선이 보이는 너른 평원 위로 보리가 익어가고, 길 위론 버스 한 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다.

보리가 익어가는 룸비니 평원의 봄, 지평선 위로 해가 뜨고, 해가진다.

버스에서 내린 뒤 마을 사람들에게 카필라 성이 어디에 있는지 물으며 걸었다. 아소카 나무가 길게 늘어선 길이었다. 7킬로미터를 걸어 카필라 성에 도착했다. 나는 무너진 벽돌더미가 2,500년 전엔 성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성 안으로 들어섰다. 성 한 가운데 자리 잡은 궁전엔 높이 1미터 정도의 벽돌담만이 남아 방들을 구분 짓고 있었다. 검은 개 한 마리가 내 발밑에 몸을 눕히더니 나비를 쫒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소 한 마리 보리수에 옆구리를 대고 가려운 곳을 긁고 있었다. 따뜻하고 나른한 정오였다. 먼 길을 걸어온 탓에 나는 고단했다. 카필라 성의 방 한 칸에 누워 잠깐 쉬기로 했다. 보리수 그늘이 햇빛을 가려주었다. 싯다르타도 이곳에서 잠을 잤겠지. 그리고 눈을 감은지 얼마나 지났을까? 상상인지, 꿈결인지 망막의 잔영들 위로 벽돌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담이 생기고, 벽이 생기고, 창문이 생기고, 지붕이 생기더니 나는 궁전의 한 칸에 누워 있었다.

나는 동문에서 늙은 사람을, 남문에서 병든 사람을, 서문에서 죽은 사람을, 북문 밖에서 사문을 보았다.삶이란 무엇이며 왜 인간은 생로병사를 겪는가? 궁전 밖의 아이들이 지르는 화창한 비명소리를 들으며 나는 고민했다. 나무엔 붉은 꽃이 피고, 꽃은 봉오리째 툭툭, 목을 꺾으며 떨어졌다. 새 파란 하늘 위론 흰 구름들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정해두지 않은 채 흘러갔고, 정원의 보리수 아래로 이파리 하나가 떨어졌다. 인간은 꽃이며, 구름이며, 이파리였다. 꽃들에게 물었다. 너는 왜 꽃을 피우며 꽃 핀 채로 있지 않고 왜 가지에서 떨어져 죽음을맞느냐고. 구름에게 물었다. 너는 왜 허공을 오가며 구름인 채로 있지 않고 왜 빗방울로 떨어져 죽음을 맞느냐고. 이파리에게 물었다. 너는 왜 싹을 튀우며 이파리로 있지 않고 왜 가지에서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느냐고. 꽃도, 구름도, 이파리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수 이파리들이2,500년 전의 노래를불러주었다.

“가야금 줄을 너무 조이니 줄이 끊어지네. 가야금 줄이 너무 느슨하니 소리가 안 나네. 가야금 줄은 알맞게 조여야 소리도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