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쳐뉴스_대륙횡단여행

[8] 빽 투 더 퓨처 - 다라의 무법자들과 하시시 폭탄

삐노 2006. 9. 27. 17:02


폴에게서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다라’라는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 마을이 삼한 시대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소도(蘇塗)’와 같은 곳인 줄 알았다.

다라는 파키스탄 정부의 힘이 미치지 않는 치외법권 지역이라는 것. 그러나, 신(神)이나 초자연적인 존재들과 영적 교류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인가, 하는 나의 종교적 상상과는 달리 폴이 수집한 정보를 종합해 보면 그곳은 소도와 같은 종교적인 성지가 아니었다. 샤머니즘이나 불법(佛法)이 아니라 불법(不法)행위가 허용되는, 군대나 경찰조차 손 댈 수 없는 지역이란 것이다. 총기소지, 음주와 마약, 달러, 프랑, 엔, 각 나라의 위조지폐와.....

- 갈 수 있어?

그리고 폴과 나의 서부(Western) 여행기가 시작되었다.

이슬라마바다에서 페샤와르로, 다시 페샤와르에서 다라로 버스를 갈아탔다. 버스 차장이 미국과 이라크전 이후 백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으니 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폴에게 권했다. 그러나, 이미 여러번 죽음의 고비를 넘기거나 행운을 경험했던 폴과 나는 간뎅이가 잔뜩 부어 있었다. 까짓거.

페샤와르를 출발한 버스가 평야를 지나 산악지대로 들어서자 경찰들이 버스를 세웠다. 그리곤 버스 안을 한번 휘이 둘러보더니 운전수와 몇 마디를 하고 내렸다. 뽀얀 먼지들과 뽀얀 산들의 풍경이 지나가고, 저 너머가 아프가니스탄일까 짐작할 무렵 버스는 가로수들이 늘어선 마을에 도착했다. 양쪽으로 상점들이 늘어선 모습. 여느 파키스탄의 마을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듯 했다. 폴과 나는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버스에서 발을 내렸다. 그순간.

- 탕, 탕, 타다탕, 탕, 탕, 타다탕

- 헉!

서부 영화 속에서 돌격 명령과 함께 기병대가 마구 쏘아대는 듯한 소총소리. 사방을 둘러보자 마치 백 투더 퓨처에 등장하던 드로이안을 타고 서부 시대에 도착한 듯한 기분이었다. 사내들은 사제총들을 하늘에 대고 온통 총질을 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도로 양편에는 대장간 같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고, 상점 안에선 풀무질을 해대며 연신 사제총을 만들어 대고, 갓 조립한 총을 테스트하느라 길에서 허공에 대고 총질을 하고. 어쩌면 세종대왕이 그려진 위조지폐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마을 안쪽으로 발걸음을 돌렸을 때 누군가가 어깨를 잡았다. 존 웨인이었다.

- 어디서 왔소?

- 한국, 폴란드

- 당장 저 버스를 타고 떠나시오.

- 우린 방금 도착했어요.

- 이곳은 이방인들에겐 위험한 지역이오. 당신들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소.

- 우리 안전은 우리가 책임질테니 가는 길이나 막지 마시오.

- 당신들은 죽을 수도 있소. 우리는 이곳이 시끄러워지길 바라지 않소.

곧 폴과 나의 등 뒤로 율 브리너와 게리 쿠퍼, 리 반 클리프 등 ‘다라의 무법자’들이 둘러싸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타고 온 버스 앞에서 담배나 피우며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곳곳에서 총소리는 들려왔다. 어디선가 OK 목장의 결투라도 촬영하고 있나 보군. 그때, 한 사내가 내 발 아래 세수대야를 내려놓았다. 그 속에는 쵸콜릿 아니, 다시 보니 새까만 하시시 반죽이 한 가득 했다.

나는생각했다. 인간들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화학 폭탄까지 만들어 냈으면서 왜 하시시 폭탄은 만들지 않는 것일까? 폭탄을 떠트리거나 가스를 살포하면 모두 전의를 상실한 채 총과 칼을 내려놓고 반나절 내내 킬킬거리다가 어? 우리가 졌네? 그렇게 인명 피해라곤 하나도 없이 승리할 수 있는, 게다가 그건 또 얼마나 유쾌한 전쟁일 것인가. 그렇게 된다면 아마 환타스틱 캠프에 머무르는 친구들은 매일 전쟁터를 찾아다닐 것이다.

- 야야, 이번 주에는 미국이랑 북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잉글랜드랑 아일랜드가 한판 붙는대.

- 너도 봤어? 군사 전략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평양 주석궁, 워싱턴 백악관, 라말라 민족해방전선 사무실, 예루살렘 정부청사, 런던 국회의사당, 더블린 IRA 본부에 하시시 폭탄이 떨어질 것 같다더군.

- 정말?? 짐 싸자!!!

다라에서 돌아오는 길, 초소의 경찰들이 길을 막았다. 이번에는 얘기가 길었다. 버스 차장이 승객들을 향해 몇 마디를 전했다. 검색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통행료를 내라. 아마 다라로 가는 사람들은 제 나름대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총기 구입을 위해서든, 하시시를 사기 위해서든, 술을 사기 위해서든, 위조지폐를 사기 위해서든. 모든 승객들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폴과 나 역시 갹출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같은 버스를 탄 이상 우리는 갹출 공동운명체인 것이다.

버스 차장이 초소의 콧수염에게 돈을 건넸지만 옥신각신, 차 아래의 트렁크를 열기 시작했다. 버스 차장은 콧수염을 진정시키고 다시 차 안으로 들어왔다. 승객들은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호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 넣었다. 통행료를 좀 더 내세요.

정부의 제복을 입고 통행료를 걷어가는 산도적들을 지나치며 남의 일 같지 않군, 하고 고국에서의 일들을 떠올리는 찰나 폴이 공무원과 제복 입은 것들에 대한 불평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의 나라에도 1980년대 한수산의 경우와 같은 필화 사건이 있었던 것일까. “……하여튼 세상에 남자놈 치고 시원치 않은 게 몇 종류가 있지. 그 첫째가 제복 좋아하는 자들이라니까……"

주변 국가에서 발생한 분쟁으로 각국의 난민들과 파키스탄 시민들이 엉킨 페샤와르의 거리에 도착하자 어둠이 슬며시 깔리고 있었다. 이슬라마바다행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검은 눈동자에 맨발의 소년이 나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그리곤 부처님께 올리는 마지(밥)를 들 듯 왼손을 오른 팔꿈치에 받쳐서는 오른 손바닥을 치켜 들었다.

나는 통행료를 낼 때와는 정반대의 심정으로 호주머니속의 지폐를 꺼내 그 새까맣고 조그만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 모습을 장삼 같은 누더기 옷을 반쯤 걸친 노인이 주장자 같은 굵은 작대기에 기대 선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1300년 전, 천축국을 오간 혜초가 지나갔다는 그 혼잡한 거리 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수 많은 차량들이, 수 많은 바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당신이 지나갈 때의 풍경도 이랬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