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_썸플레이스

썸플레이스 1 - 크로아티아의 국제부랑자, 막스

삐노 2009. 3. 7. 02:15


내가 아는 어떤 남자는 열차 시간표를 하나도 빠짐없이 외우고 있었다. 세상에서 그를 즐겁게 하는 유일한 것이 바로 열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온종일 역에서 살다시피 하며 열차들이 도착하고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 페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 중 '기억력이 좋은 남자'에서

페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를 처음 읽은 것은 열 여섯의 어느 날이었다. 책 속에는 정말 이상한 사내들로 가득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믿을 수 없다며스스로 '지구는둥글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길을 떠나서는 돌아오지 않는 사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 일상이 지겨워 모든 사물의 이름을 바꿔 부르다가 결국 아무하고도 대화를 할 수 없게 된 사내, 세상을 등지고 발명에 전념하다가 수십 년에 걸쳐 자신이 발명한 발명품이 이미 발명된 텔레비전이라는 것을 알게 된 발명가, 요도크 아저씨 이야기만 되풀이 하다가 결국 모든 단어를 '요도크'로 바꿔 부르게 된 할아버지, 아무 것도 더 이상 알지 않고 살려고 애쓰다가 결국 중국어까지 배우게 되는 사내, 정말 읽다 보면 내 정신까지 이상해지는 그런 책이었다. 아마도 페터 빅셀이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소외’와 ‘의사소통의 부재’에 대해서 이해하기엔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어렸던나도 어느새 어른이 되고, 유럽여행도 가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국제부랑자 막스를 만났는데, 그를 만나게 되자 <책상은 책상이다>에 등장했던 사내들이 실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를 출발해 유고연방에서 떨어져 나온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 도착한 것은 해가 다 저물 무렵이었다. 나는 2시간 뒤에 출발하는 야간열차를 타고 항구도시 스플리트로 갈 예정이었다. 광장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을 때 옆에 있던 금발의 사내가 물었다. 나 담배 하나 줄래? 나는 그에게 한 개비를 건네주었다. 이건 헝가리 담배잖아, 난 독일 담배만 피워! 독일 담배 없어? 없는데. 그럼 나 한 푼만 줄래?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인양 능청스레 돈을 달라는 그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지갑을 열어 돈을 내밀었다. 에이 이건 달러잖아, 도로 가져 가. 마르크는 없어? 동냥질로 얻은 돈의 국적을 가리다니 그는 정말 이상한 거지였다. 독일에서 왔다는 막스는 이제 이 나라가 지겨워졌고 기차표를 살 돈만 모으면 고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말했다. 그는 계속 마르크가 필요하다고 했다. 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환전하면 되지, 왜 꼭 마르크가 필요한 걸까?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뿐만이 아니었다. 각 나라에서 자그레브 역으로 들어오는 열차의 도착 시간를 다 외우는 막스가 사라졌다가 나타날 때면승객들이 두고 간 잡지를한 아름씩안고 있었다.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역에서 지내는독일인 국제부랑자,막스는 뭘 하던 작자였을까?

그는 잡지 속에 수록된 그림들이 어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지 죄다 기억하고 있었다. 휘릭. 이것 봐, 이 그림은 구겐하임 갤러리에 있어. 휘릭. 히히히 이 그림은 테이트 갤러리에 있지. 휘릭. 그렇지, 이 그림은 루브르 미술관에 있어. 그렇게소리쳐대던 막스가손목시계의 알람이 울리자 화들짝 소리쳤다. 이런 커피 타임이잖아! 커피 한잔 마시고 다시 올게. 밤이면쉬는 열차 안에 숨어 들어가 잠을 잔다는 노숙자가 커피 타임을 꼬박 꼬박 챙기다니 도무지 알 수 없는 친구였다.

나는 열차 시간이 되어 막스와 헤어졌다. 바다로 가는 야간열차 침대칸 2층에 누워 발아래의 달과 별과 산구릉을 내려다 보다가 문득 막스가 페터 빅셀의 소설에 등장하던 사내 - 기차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외우고 나선 그 도시의 모든 계단 숫자를 외우고 결국 전 세계 모든 계단의 숫자를 알기 위해 기차를 타고 떠났던 사내 -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각 도시에 존재하는 모든계단의 숫자를알게 된 후,전 세계 모든 그림들이 어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지 알고 싶어졌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