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_썸플레이스

썸플레이스 2 - 인도에서 만난 홈워크라는 이름의 여행객

삐노 2009. 3. 18. 03:37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읽어두면 유익한 책으론 어떤 게 있을까? 이 질문에 여행지의 정보가 담긴 가이드북이나 현지의 생생한 사진들로 워밍업을 시켜주는 여행에세이를 꼽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같은 질문을 내게 한다면 난 오쇼 라즈니쉬의 <틈>을 추천하고 싶다. 아, 당신의 여행지는 인도가 아니라고? 그렇다 해도 <틈>을 추천하겠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꼼꼼한 ‘정보’나 빈틈없는 ‘일정’이 아니라 여행을 대하는 ‘자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미리 모든 것을 정해놓아야안정이 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난 그들이 ‘숙제’를 하러 온 것인지 ‘여행’을 하러 온 것인지분간이 되지 않아 어리둥절해진다. 그들은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여행, 즉 모험을 하러 온 게 아니었던가?

두려워하는 사람은 좀처럼 실수하지 않는다. 그들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대신, 텅빈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존재를 위해 어떤 것도 기여하지 않는다. 이 땅에 와서 무료하게 있다가 죽는 게 그들이 하는 전부이다 - 오쇼 라즈니쉬의 <틈> 中

짤막한 여행에서 돌아와 쉬던 어느 주말 서점에 들러 '과거'와 '미래' 사이를 한가롭게 어슬렁 거리다가 '영원'으로 통하는 틈을 발견했다. 아니 그런 문장이 씌어진 책을 발견한 것이다. 오쇼 라즈니쉬의<틈>. 범상치 않아 보였다.그러나 책 제목이 <틈>이 아니었더라면 책의 틈을 벌리고 안을 들여다 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영화 있지 않은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얘기해서 안 봐도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는 듯한 영화. 말하자면 내게 오쇼는 너무 회자되어 식상해진 영화 같은, 인물이었다. 근데 앞뒤 수식어나 서술어도 없이 그저 <틈>이라니! 제1장 인생의 틈, 제2장 변화의 틈, 제3장 사랑의 틈, 제4장 존재의 틈.

<틈>을 읽고, 그래서 인도에 갔던 것은 아니다. 네팔의 룸비니에 갔다가 만난 여행자들이인도 얘기를 하면서 인크레디블! 인크레디블! 감탄을 늘어놓으면서왜 인크레디블인지 묻는 나의 질문엔 전혀 대답하지 않는 통에 과연 인크레디블의 실체를 확인이나 해보자는 심뽀로 떠난 여행이었다. 국경에 도착하는 순간, 아치형 간판에 씌어져 있는 글씨. <인크레디블 인디아> 그건 <다이나믹 코리아>처럼 인도의 슬로건이었다. 그래서 인크레디블이었다니, 시시하게시리! 그랬는데 바라나시에서 딱 3일을 보내고 나자 내 입에서도 “인크레디블!"이란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 골 때리는 인도!

골 때리는 인도에서 나랑 같은 방을 썼던 친구는하루 종일 침대 위에 엎드려 레스토랑과 호텔과 교통 정보를 비교분석했다. 그가 정보를 분석하고, 분석하고, 분석하는 동안 나는 무작정 갠지즈 강변과 거리를 떠돌았다. 그리고 해질 무렵 숙소로 돌아와 모든 정보를 섭렵한 그를 앞세워 ‘가장 맛있다’는 식당으로 갔다. 이름 붙이자면'홈워크'란 이름의그 친구와나는 보드가야까지 동행했는데 그는 그 여행길에서 '이 지역 식당은 불결하니 음식을 먹어서는 안된다고 가이드북에 씌어 있다’ , '이 지역은 밤에 도적떼가 나타나니 지나가면 안 된다고 가이드북에 씌어 있다'며여러 차례 가이드북을 들먹이며 나를 말리곤 했다.

보드가야에도착한 후 그는 다시 예의 그 숙제를 꼬박꼬박 했다.며칠 후 그는 다른 도시로 떠났다. '홈워크'란 이름의 친구가 떠난 후나는 가이드북 한 권 없이 보드가야에서 지냈다. 그와 같이 보낸 시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모험과 사귐과 웃음이 만발하는 축복의 시간이었다. 내일 일은 아무 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대신 오직 ‘알 수 없음’의 자유만이 가득했다. 모든 것이 불안정했지만 불안정을 삶의 실체로 받아들이자 모든 것이 편안했다. 그래, <틈>의 문장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