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쳐뉴스_대륙횡단여행

[16] 북경으로 가는 중국대륙횡단 열차.

삐노 2006. 11. 14. 12:42



중국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내가 알고 있는 어떤언어도 통하지 않았다.영어도, 한국어도, 그들은 심지어 영어로 질문을 하는 동양인을 "이봐, 여기 새까만 머리에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녀석이 꼬부랑 말을 하는군" 하고 비웃기까지 했다. 전세계 곳곳의 번화가에 차이나타운이 있고, 15억 이상의 인구가중국어를 사용하고 있으니상대적으로 소수의 사람들이 사용하는다른 언어를사용해야할 필요성은 전혀 느끼지 않는 듯 했다.그들은 여전히 중화, 즉 중국이 이 세계의 중심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전세계 인구의 60억 인구 중 15억이중국인이고 보면, 이 행성에 발 붙이고 사는 사람들 중 네 사람 중 한 사람은 중국인인 셈이고 어쩌면 그들은이 지구란 행성도 중국인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지도몰랐다.

카쉬가르엔 기차가 다니지 않았고 북경으로 가기 위해서는 신장의 중심지, 우루무치로 먼저 가야 했다.신장. 와호장룡에서 용(장쯔이)이 마적단 두목이자 연인인호를 만난 곳.신장은위구르족 자치지역으로서철도가 연결되어 있는 도시, 우루무치를 제외하면 허허벌판과 다를 바 없는 미개척지였다. 회교도인 위구르족과 파키스탄을 오가는 상인들이 많았던 탓에 무하마드의 안내를 받으며일단 우루무치로 가는 버스를 탔다.다음날 새벽에나버스가 우루무치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창 밖으로서역의 사막과 산맥들이 지나가고,식사시간대가 되면 오아시스같은 마을에서잠시 정차했다.시장의 풍경은1970년대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마치 조선시대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악명 높은공중 화장실들. 칸막이도 없이 뻥 뚫린 푸세식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옆 사람과 담배를 나눠피는 사내들. 그건 정말 요상한 풍경이었다.밤새 버스는 달려 다음날 새벽 우루무치에 도착했지만 역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국말도, 영어도, 파키스탄어도 통하지 않았다.


나는 종이에 한자로 이라 적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묻기 시작했다.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驛이란 글자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끌어왔다.한 사람이한심스럽다는 듯 무하마드와 나를 향해 키득거리며 驛을 중국어로 읽었고 그제서야 문맹의 사내들이 키득거리며방향을 가리켰다.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 광장에는사람들이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무하마드가 광장을지나가는 아랍인에게 물었다. 예매를 하지 않기때문에 당일날 줄을 서서 기차표를 사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출발하는 기차표가 다 팔리면 기차를 탈 수 없다고 말했다. 중국에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는 느낌이었다. 과연기차표가 우리들 몫까지남아 있을까. 무하마드와 나는 기다란 행렬의 뒤에 줄을 섰다. 역광장의 한가운데, 남자 양복을 입은 아주머니가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카악, 퇘! 하고 가래침을 내뱉었다. 사내들보다 여자들이 오히려 더 터프했고, 목소리가 컸다.

아직 여행의 신이 내 어깨 위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일까? 우리는 북경으로 가는 기차표를 구할 수 있었다.침대칸은 이미 매진된 상태였고, 좌석표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사실 내 호주머니 속에는침대칸을 구입할 넉넉한 경비도 남아 있지 않았다.중국대륙횡단열차가 북경에 닿을려면 50여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3박4일. 3박4일간을 앉은 채 여행을 해야한다.그리고5만원도 되지 않는 돈이 남아 있다.그것은 내가 산뚱반도에 도착하더라도 한국으로가는 배를 절대 탈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오후 5시가 되어 기차가 출발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새마을열차로 4시간에 이르는 거리도 앉아 있으면 엉덩이가 배기는데 50시간이 넘도록 앉아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영국에서 한국까지 오는 동안30시간, 40시간, 50시간 씩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는일에는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밤새 짱깽짱깽짱짱깽 떠들어 댔고 나도 무하마드도 좀처럼 편히 잠 들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열차 칸 사이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한 사내가 물었다. "저기 이슬라마바다에서 본 것 같은데, 한국 사람이세요?" 그는 나를 중국 대사관 앞에서 보았다고 했다. 한국에서 노동자로 일한 적이 있다는 삼십 대 중반의 파키스탄인. 그는 침대칸에서 묵고 있었는데 자신은 지난밤 푹 잤으니 낮 동안 자기 대신 침대에서 눈을 좀 붙이라며 호의를 베풀었다. "중국인들은 다른 사람 배려를 전혀 안 하는 이들이라 말씀 안 하셔도 압니다. 저도 예전엔 좌석에 앉아 북경에 간 적이 있었는데 정말 고생했어요." 중국대륙을 횡단하는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열차 칸 사이에서 담배를 나눠 피우곤 했는데, 그가 한번은 이런 질문을 했다.

- 한국 공장에서 일할 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었어요. 파키스탄에선 노인들이 육십 즈음이 되면 일손 놓고 집에서 편히 쉬면서 말년을 보내죠. 근데 한국 공장에서 육십이 넘은 할아버지, 할머니들 많이 봤어요. 몸도 약한 분들이 힘든 공장 일 하며 돈 벌고 있었어요. 공장뿐만 아니라 거리에서도 힘겹게 일 하는 노인들을 봤지요. 한국은 파키스탄보다 몇 십 배나, 정말 잘 사는 나라잖아요? 근데 어떻게 편히 여생을 보내야 할 노인들이 공장에서 힘든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어요. 왜 그런 거죠?

나는 그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