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쳐뉴스_대륙횡단여행

[13] 불의 동맥, 세계의 지붕에서 삐노는 이렇게 보았다.

삐노 2006. 10. 17. 10:25


이 행성에서는평등해지는 데 있어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상대가 있는 높은 쪽에 맞춰 내가 올라서는 방법, 또 하나는 내가 있는 낮은 쪽으로 상대를 끌어내리는 방법.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꿰뚫어 보았던프리드리히 니체란 친구는인간은 통상 후자를 택한다고 말했었지.

훈자.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자전세계적으로장수 마을로 알려져 있는 곳. 그러나, 예전처럼 사람들이 장수를 누리지는못한다고 한다.하늘의 뜻에 따라 살던 이들은 관광객으로 인한 자본의 유입과 함께 눈을 점점 아래로 향하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그들의 수명은 100살에서 차츰 차츰 낮아져, 산 아래 사람들과 점점 평균을 맞춰가고 있었다.

폴과 나는 가파른 오솔길을걸어 오르며 게스트 하우스를 찾았다.폴은[론리 플래닛]에서 언급한어느 게스트 하우스를 이미점 찍어 두고 있었는데그곳은 숙박비가 저렴하고전망 좋은 지붕이 있다고 했다.[The Roof of The World]란알파벳이 파란 담벼락에 흰 글씨로 씌여 있는 곳. 드디어 찾았다.방도 잡았고,베낭도 내려놓았으니 어디 지붕에나 가볼까?지붕의 테라스에는 이미 도착한 베낭족들이 자신들의 여행 경로를 떠들어 대며 히말라야의 일몰을 지켜보기 위해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었다.

- 어느 나라 사람이죠?

- 한국

- 폴란드.

녀석들이 호들갑스레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물었지만 폴도 나도 그들에게 무심했다. 폴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홀로코스트에 몰아넣었던 독일 나치와 함께 손 잡았던 족속들이라 그랬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유난히 일본인을 혐오했다. 우리는 지붕의 끝에 서서 아래로 아득히 펼쳐져 있는 산들과 산맥들을 내려다 보았다. 지리산 천왕봉이나 설악산 대청봉에서 내려다 본 풍경에서 나무 대신 바위와 얼음만이 남으면이런 풍경이 될까?거대한 별, 태양이 설산 너머로 천천히 사라지는 모습은 장엄했다,마치 슈트라우스의[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온 천지에울려퍼지고 있는 듯


- 폴. 우린 '세계의 지붕'의 지붕 위에 서 있어! 하하하

- 하하하 그렇군.'세계의 지붕'의 지붕!

이미 폴과 내가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식사시간이지나 있었고, 우리는식당을 찾아 나섰다. 게스트 하우스 가까이식당이하나 있었지만 훈자의 골목과 집집 마다의 풍경들을구경할 겸어슬렁 어슬렁거리며 다른 식당을 찾기로했다. 히말라야의 황혼 속에 물들어가는훈자 마을은 어쩐지강원도의 탄광 마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산복도로 같은 좁은 길들을 따라가다 텅 빈 공터가 나오며 불 켜진 식당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우리는 달과 짜파티를 시켰다. TV 화면에서는 위성으로 STAR TV의 뮤직 비디오가 방영 중이었다.

- 당신들은 운이 참 좋은 분들이군요.

- 네?

- 오늘은 이곳출신의종교 지도자가 10년만에 고향을 방문하는 날이랍니다.

- 아, 네에.

- 그 분이 아래 마을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오면 그 분을 위한 환영 행사가 시작될 겁니다.훈자를 지나가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오늘 좀처럼 보기 힘든 걸 보게 될 겁니다.

- 행사는 어디서 하죠?

-어디서 한다기보다는, 나중에 직접 보시면 알게 될테니 방으로 들어가지 마시고,지붕이나 바깥에 나와 계세요.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오는 길, 가로등 아래에 어울려 놀고 있던 훈자의 꼬맹이들이 폴과 나를 향해 까르르 웃었다. 몽돌처럼 동글 동글, 똘망 똘망한 아이들의 웃음을 보자 착시 현상처럼 대학시절 홀로 여행을 다닐 때, 강원도 탄광마을에서 만났던 꼬맹이들이떠올랐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100 - HAVE A NICE TRIP 카테고리 중 [6] 비숙련 정조대 제조공이 만든 정조대와 그 속의 어둠]에 대해서도!

식당의 노인이 일러준 대로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하자 마자지붕으로올라갔다. 그러나, 별 다른 변화가 없었다. 위아래, 전후좌우를둘러봐도총총한 별들과 총총한 별빛이 반사된 듯 깜박이고 있는 훈자의 가옥들과설산이 있었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어둠의 벽들.담배를 피우며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기다려보았지만 아무런 변화도없었고, 또한 아무도 없었다.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일본 아이들은각자방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에이취!나는 외투를 좀 더 껴입고 나오기 위해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섰을 때,폴이 위에서 신이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 R, 어서! 어서! 올라와, 이건 정말환상이야! 와우!!!

나는 후다닥 계단을 뛰어 올랐다. 아!

사방에서불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아니, 불로 된 물이훈자를 둘러싸고 있는가파른 설산자락을 따라이리 저리 빗금을 그으며내려오고 있었다.그제서야 나는 식당 주인이 말했던 환영 행사가 무엇인지 알 수가 있었다. 훈자의 사람들은10년만에 귀향하는그를 환영하기 위해아래 마을에 그가 도착했다는 연락과 함께훈자를 둘러싼 설산 곳곳에미리 준비해두었던어떤 액체에 불을 붙인 것이다.산자락을 따라 아래로 흘러가는그것들은 마치 불의 혈관처럼보였다. 내가 보았던 그 기이하고 환상적인 광경을 어떻게 말로 전할 수 있으랴.

달빛으로 흐릿한 윤곽만이 보이는 암흑의 산들, 폴과 나 그리고훈자를둘러싼 6,0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암흑의 산들마다에서불의 동맥같은, 용암 줄기같은 것이흐르는 듯, 멈춘 듯, 아래로 아래로 뻗어가던장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