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쳐뉴스_대륙횡단여행

[15] 굿 바이 파키스탄, 굿 바이 폴 !

삐노 2006. 11. 12. 20:52

[눈 뜨면 다른 도시여라]라는 카테고리 속에 그 시절의 여행길을 기록하는 동안벌써 한 해가 저물어 가는 마지막 달을 남겨두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나는 서둘러 [다이제스트판]으로 달려가야 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아마도 이야기하고 싶었던 여러가지 것들을 그냥 넘어가야 하리라.

카슈가르에서 숙소로 안내해주었던차이나 걸,역광장 한가운데 양복 바지호주머니에 손을 꽂고가래침을 탁 뱉던 중국인 아주머니, 중국대륙횡단열차에서 만난 前 한국외국인노동자파키스탄인 사내,외국인 Free 북경의 나이트클럽, 도심의 역주행 차량들,동부공단지역굴뚝의 시커먼 연기,어마 어마한 규모로 건설되고 있던 아파트 단지, 그 외에 이 시리즈를 시작할 때 예고했던 사건들의 디테일같은 것.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트럭이 수스트에 도착하자 폴과 나는 출국 수속절차를 밟고 정오까지 기다려 9인승 차량에 몸을 싣고, 파키스탄의 마지막 마을을 떠났다. 다시 2시간 가량을 달려 쿤제랍 패스(해발 4,760미터)에서 차는 섰다. 운전사가 중국 국경 초소의 군인들에게 서류를 건네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발을 내려놓았다. 내가 두 발로 디뎠던 가장 높은 곳이 지리산 천왕봉 1,915미터. 백두산(2,744미터)의 두 배 높이를 넘어서는곳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다. 가시거리가 닿는 끝까지 설산만이 이어지는 곳. 여기서부터 서쪽은 파키스탄이고 동쪽은 중국이다. 굿바이, 파키스탄!


중국 국경에 도착하자 마자 입국세관에서 수화물 검사를 받았다. 환타스틱 캠프에서 만난 다비드가 알려준 대로 나의 뇌해마의 한 페이지에는 마리화나 재배법이, 나의 침낭 속에는 비누로 깨끗이 씻은 서른 여섯 알의 마리화나 씨앗이 들어 있었다. 나는 중국 국경도 여느 국경처럼 그저 비자를 확인하고 여권에 도장을 찍는 것으로 입국절차가 끝날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엑스레이 검색대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는데........배낭과 침낭을 엑스레이 검색대에 올려놓자 덜컹, 위잉 소리를 내며 검색대 위를 지나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적발될런지도 모르고, 운이 나쁘다면 중국에서 당분간 실형을 살게 될런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들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몰랐다, 중국에서 불법 환각제를 밀반입하거나 밀반출하다 적발될 시에는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사형에 처해진다는 것을.

중국, 한국인 마약사범에 사형 선고 [SBS TV 2006-05-25 12:40]

중국에서 필로폰을 밀반출하려다 붙잡힌 한국인 2명이 최근 사형과 무기징역형을 각각 선고받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최근 랴오닝성 선양시 법원은 지난해 10월 7백여g의 필로폰을 밀반출하도록 하수인에게 지시한 혐의로 한국인 김 모 씨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또 이 필로폰을 직접 밀반출 하려했던 이 모씨에게는 무기징역형을 내렸습니다. 지난해 8월말 현재 중국에서 마약사범으로 복역중인 한국인은 모두 30명이며, 그 가운데 13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저작권자(c) SBS & SBSi All right reserved.]

중국 국경에서의 <미드나잇 익스프레스>가 상영되려던 그 순간, 또 한번 여행의 신이 내 어깨 위에 내려앉았던 것일까? 엑스레이를 통해나의 소지품들을들여다 보던세관원이 서른 여섯 알의 알갱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침낭은 무사히 검색대를 통과했고, 나는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정작 그 순간의 나는 목숨을 구했다는 것조차도모르고 있었다. 곧 날이 이미 저물었고 한국아 좋아! 라고 생글거리는 두 여학생의 소개로 기숙사같은 숙소를 구해 국경도시에서 중국에서의 첫날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폴은 폴란드에서 출발하여 티벳으로 가던 자신의 여행길을 포기했다. 고산병 증세에 갑작스런 독감까지 겹치면서 폴은 자신의 몸 상태로 중국을 횡단하는 것이 무리라는 판단을 내렸다.
나는 낮은 지대로 내려가면 괜찮아질 거라며 폴을 위로했지만 그는 왠지 중국이란 나라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결국 폴은 나를 중국 국경도시에 내려놓고 파키스탄으로 되돌아갔다, 마치 그곳까지 나를 무사히 데리고 오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는 듯이.


굿 바이폴! 폴이 떠나고 나자 갑자기 혼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꼼꼼한폴이 없었더라면 세계지도 한 장 외에는 어떤 가이드북이나 여행 정보도 없는 내가 무사히, 그 얇은 지갑으로 중국까지 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폴을 서쪽으로 향하는 차에 태워 보내고 숙소로 돌아와 배낭을 맸다. 이 나라에선 내가 아는 어떤 언어도 통하지 않으리라.


손짓 발짓만으로 서역에서 산둥반도까지머나먼 길을지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집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내 여동생의 결혼식 날까지 도착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이제 중국의 서쪽 끝에 도착했을 뿐인데닷새가 남았고, 지갑 속에는고작 9만원 귀국행 뱃삯에도 못 미치는 돈이 남아 있었다. 폴도 나도 가난한 여행자였던 탓에 가장 값싼 음식과 숙박지를 찾아 다녀야 했지만 둘이라는 이유로 언제나 든든했는데 혼자가 되자 앞으로 가야 할 길들이 깜깜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한시라도 빨리 출발해야지, 근데 어디부터 가야 하지? 방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 Where are you going?

전날 밤 숙소의 공용화장실에서 수건을 빨고 있었던 한 아랍인이 물었다. 나는 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을 세상 구경을 하러 나온 파키스탄의 철학교사라고 소개했다. 지혜롭고 따뜻한 눈매를 가진 사내였다. 왠지 그의 눈빛은 우리 오래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지요, 하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나보다 서너 살이 많을까?

- 일단 북경까지 가시겠군요. 제가 별 도움은 안되겠지만......어때요? 동행할까요?

그가 폴이 내려놓고 간 R이라는 바톤을 이어 받았다. 마치 그의 임무는 나를 중국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는 것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