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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삐노, 국제기자 되다 - 웃음의 핵 폭탄, 목숨을 지켜라!!!

삐노 2006. 10. 9. 11:45


20세기말, 장자크 아노가 영화로도 만들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움베트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14세기 이탈리아의 어느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요한 계시록을 흉내낸 묵시록적인 주검들의 원인은 윌리엄 수도사의 비범한 통찰력으로 한꺼풀 한꺼풀씩 베일이 벗겨지고, 베일이 모두 걷힌 자리에는 아무도 읽은 사람이 없으며, 영원히 사라졌다고 알려진 한 권의 책이 놓여져 있다. 시학(詩學) 제2부.

진리를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된다면 재담이나 말장난도 그리 큰 허물이 되지 않으며, 재담이나 말장난이 진리를 나르는 수레일 수 있다면 웃음 역시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역작

독 묻은 책을 스스로 먹어 치움으로써, 이 책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없게 했던 호르헤 신부는 말한다, 웃음은 신의 권능을 부인하는 악마의 선물이며, 인간은 웃는 순간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무시하게 된다고. 만인이 읽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비극의 정의, 비극의 요소, 비극적 플롯,비극적 인물의 성격 등등을 다루며 비극悲劇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면 제2부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희극喜劇(이었을 것이라고 움베르토 에코는 가정한다, 있지도 않았던 책에 대해서). 웃음에 대해 씌여진 그 한 권의 책을 읽었던 자들은 남김 없이 살해 당한다. 결국 [장미의 이름]은 웃음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게 어떤 시대, 어떤 상황에서는 웃음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 아니 살해의 동기가 되기도 한다.

암흑의 중세가 아닌 최첨단의 동시대, 나는 웃음 때문에 죽을 뻔 한 적이 있다. [장미의 이름]의 배경이었던 카톨릭 사원은 아니었지만, 이슬람 사원인 어느 모스크에서. 그리고 사실 지금 떠올려 보면, 죽어도 마땅할 짓을 저지른 셈이었다.

모스크[Mosque] 이슬람교의 예배당. 집단 예배를 보는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로 군사, 정치, 사회, 교육 따위의 공공 행사가 이루어진다. 아랍어의 마스지드가 프랑스어 모스케를 거쳐 영어로 변한 것으로 회랑이 있고, 안뜰에는 청정 의식을 행하는 샘물이나 수반이 있으며 회랑 한 쪽에는 1~6개의 탑이 높이 솟아 있다.예배 시각이 되어 모스크를 지키는 무아딘이 탑에 올라가 예배를 권유하는 아잔을 소리 높여 낭송하면교도들은 코란을 외면서 예배를 드린다. 수백 명을 단위로 하는 모스크가 있는가 하면,수 많은 사람이 참석하여 모이는 자미야라고 하는 대형 모스크가 있다.

오후가 되어 말벌에게 물린 자리도 가라앉고 절름 거리는 것이 조금 나아지자 폴과 나는 오전에 들리기로 했었던 대형 모스크을 찾아 길을 나섰다. 시내 버스를 타고 사원 근교에서 내렸다. 주택가임에도 불구하고 여느 파키스탄 주민들의 집들과는 사뭇 달랐다. 주차장이 딸린 집 안에는 개인 금고가 있고, 금고 안에는 물방울 다이어몬드와 사과 궤짝에 든 현금 다발들이 가득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서울의 P동이나 S동의 고급 주택가처럼, 이슬라마바다 시민들에게 위화감을 일으킬 듯한 분위기의 집들을 지나 사원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선 왠지 묵직하고 심각한 공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그 공기는 종교적 사원들에서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엄숙한 분위기와는 달랐다. 여기엔뭔가 특별한 것이있다. 붉고 검은 플랜 카드와 깃발들, 그리고 상기된표정의군중들, 분주한 움직임.

- 무슨 일이 있나 본데? 가 보자.

사원 안의 한 장소에서는 대중 집회가 열리고 있는 듯 했다. 아마도 얼마 전에 있었던 종교지도자에 대한 암살 사건과 관계가 있는 듯 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거나 흥분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내들을 지나 집회가 열리는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그 집회의 안내원인 듯한 현지인이 우리를 막아 섰다.

- 관광객들이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 무슨 일로 집회를 하는 겁니까?

- 뭐 하는 사람이요?

- 에.....저는.폴란드에서 온 국제 기자입니다! (뭐? 폴, 니가 국제 기자라구!) 휴가차 파키스탄에 여행 왔지만 중요한 사안인 듯 하니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습니다.

- 당신도 기자요?

- 네. 저는 한국에서 온 국제 기자입니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 음......기자증을 보여주시오.

적당히 집회의 사안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면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기자증까지 보여달라니 글렀구나, 그냥 사원 구경만 하고 돌아가야겠어. 어물쩍 뒤돌아 서려는데 폴이 자신의 지갑을 꺼내더니, 여권 안에 든 것을 안내원에게 내밀었다.학교 컴퓨터로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국제 기자증 이미지 파일을 다운 받은 후, 친구가 일하는 인쇄소에서 칼라 프린트해서자신의 증명사진을 갖다 붙이고 코팅했다던그짝퉁위조 국제기자증을!!!

- 당신은?

- 에.......휴가차 왔기 때문에 기자증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 사건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다면 저희가 취재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게 좋을 것입니다.

- 이 사람은 제가 서울에서 특파원으로 있을 때 알게 된 한국 기자입니다!!

어쩜, 손발도 안 맞춰본 기자 사칭극이 그렇게 딱딱 맞아 떨어질 수가!폴란드와 코리아의 국제 기자가 되어 버린 폴과 나는 집회장 안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섰다. 그렇게 안내원이 가로대를 치우고 집회장 안으로 들여보내줄 때만 해도좋았는데안내원이과도한 배려를 하기 시작하면서 일은 이상한 방향으로 점점 꼬이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를 그저 입장 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끝낸 것이 아니라자리를 마련해주겠다고 앞장 서기 시작했던 것. 그는 폴과 나를안내하면서A석, B석, R석 등 가로대 앞에서 드문 드문서 있는안내원들에게 폴과 나의가짜 신분을 대신 밝히며길을 텄다.

- 누군데?

- 폴란드와 한국에서 온 국제기자입니다.

- 누군데?

- 열어 주세요. 국제 기자가 왔습니다.

- 자자, 다들 잠깐 비켜주세요.

그렇게 그저 구경이나 하자던호기심으로 시작된 기자 사칭극은 폴과 내가 유럽과 아시아를 대표해 사건을 취재하러 온 전세계 공식 국제 기자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미 극이 시작된 이상 어쩔 수 없이 영화 배우가 되어 버린 폴과 나는 집회를 지켜보기에 좀 편안하고 좋은 자리 정도로 안내하겠지 하고 조금은 횡재한 기분으로 안내원을 오라는 대로 따라나게 되었다.결국 앞에서 들려오는 연설을 들으며 흥분하고 있는 군중들을 비집고 안내원이 국제 기자를 사칭하고 있는 우리를 안내해 준 자리는 다름 아닌 연단 바로 앞에 책상까지 마련되어 있는 VIP석. 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지? 파키스탄 정치, 종교의 주요 인사들 옆 자리에 앉게 된 폴과 나.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사소한 장난기로 시작된 기자 사칭극이 그 지경으로 전개되어 버리고 나자, 만약 웃음보라는 것이 정말있다면 그 곳에 바람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웃음에 도화선이 있다면 연기가 피어오르기시작했다.참아야 해!

의자에 앉아연단 위를 바라보자일렬도앉아 일제히 폴과 나를 내려다 보는 엄숙하고 심각한 시선들. 그때였다, 연단 위의 한 사내가 폴과 나를 VIP석으로 데려다 준 안내원을 불러 우리들의 신분을 물은 것은. 국제 기자들입니다.그 대답과 함께 그는 지금껏 폴과 나를 기다려 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못 의미 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싶더니갑자기 주먹을치켜 들며 마이크에 대고꾸오아아끄 떼끄우꾹! 꾸오아아끄 떼끄우꾹!.....[지구를 지켜라]의 병구가 강 사장을 향해 "난 다 알아, 니들이 왜 안드로메다에서 지구까지 왔는지, 니들이 지금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우리 엄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니 원래 이름이 quoaaktekguk라는 것까지!"라고 소리칠 때의 그외계인 이름 같은 구호를 외쳤고, 그와 동시에등 뒤에서로열 분체교감 유전자 코드를 가진 강 사장의 본명 이 집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꾸오아아끄 떼끄우꾹! 꾸오아아끄 떼끄우꾹! 꾸오아아끄 떼끄우꾹! 꾸오아아끄 떼끄우꾹!!!

그건 마치 웃음의 도화선 옆에다 다이너마이트를박스채로쏟아부은 것과 같은 효과를 냈다. 시나리오도 보지 않고 뛰어든 '기자 사칭극'의 클라이막스는 두 초보 영화배우의 뱃 속에 장전되어 있던 웃음의 도화선에 완전히 불을붙여 버렸다. 기자 사칭극의 발단이 전개과정을 거쳐 드디어 절정에도달해 버린 것.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 이제 죽음이다!

찬물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잔뜩 찡그린 얼굴의 지도자들, 들통난 위조 국제 기자증, 흥분한 군중들, 쏟아지는 발길질과 주먹질.

정말 그렇게 웃음을 터뜨렸다면나는 아마도 집회에 참석한 군중들에게 몰매를 맞아 죽어 이 글을 쓰고 있지 못할 것이다.펑, 펑, 펑.......배 속에서는 '웃음의 핵 폭탄'이 마구 터져 대는데 도무지 상황이 상황인지라 웃을 수가 없었다. 고국에서 집회와 시위를 수없이 겪어본 폴과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외치고 있는지, 그들이 얼마나 흥분되어 있는지. 그러나, 그러나, 아, 아무리 멈추려고 해도 터져 나올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다.

고개를 들면 웃음이 터지고 말까 봐,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참고 있던 나는 혹시 내 배 속에서만 '웃음의 핵 폭탄'이 터져 대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폴을 쳐다보는데,이 황당한기자 사칭극의 시초를 제공한 폴도예상치 못한이 클라이막스는 참을 수 없었던지 웃음을 참느라얼굴이 시뻘개져서는어깨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아, 젠장 하필이면 그때 녀석이 나를 쳐다봤을까? 눈이 마주치고 나자, 웃음보는 이제 한 모금만 더 불면 터져 버릴 풍선처럼 부풀었고, 나는 죽음의 대단원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었고, 이빨로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아, 안돼, 제발!!! 아무리 슬픈 생각을 하고, 우울한 장면을 떠올리고, 허벅지를 꼬집고, 입술을 꼭 깨물어도 웃음의 핵 폭탄은 폭발을 멈추지 않았고,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온몸으로 퍼져 갔으며, 나중엔 참느라고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폴과 나는 한 시간이 지나 그 집회의 현장에서 빠져 나오는 동안에도서로에게 눈길도 주지 못했고, 서로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 절대절명의 클라이막스 를 무언극으로 참아냈던 우리 두 사람이 서로에게 입이라도 열면 한껏 억눌러뒀던웃음이 한꺼번에 터져버릴 것같았기 때문이다. 눈물 범벅이 되어 우리는 집회장을 빠져 나왔고,군중들은 우리들의 얼굴 위로 흘러 내리는 눈물 자욱을 보며 감격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희극(喜劇)에서 비극(悲劇)으로 장르가 건너뛸려는지점들을 무사히 넘긴 폴과 나는 [목숨을 지켜라]를 고수하며 사원에서 빠져 나와 100여 미터나 침묵으로 걸었고,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골목 귀퉁이를 도는 순간 동시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 순간은마치 2시간 동안 숨을 참으며 8,000미터 깊이의어두운 바다 속까지 잠수했다가다시 수면 위로 얼굴을내민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때론 웃음이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OO 사칭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 OO에는 기자, 고위 공무원, 청와대 관계자, 전직 판사, 검사....등등이 있다.